메이저리그에 몰아친 한겨울 회오리 [방석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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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리그에 몰아친 한겨울 회오리

2020.02.10

한겨울인 지금은 국내 프로야구도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도 새봄에 시작될 새 시즌에 대비해 선수를 보강하고 전력을 다지기에 분주한 때입니다. 그런 중요한 시기에 메이저리그에는 임원, 감독 해고 회오리가 거세게 몰아쳤습니다.

2017년 휴스턴 애스트로스에 창단 반세기 만에 처음 월드시리즈 우승의 기쁨을 안겼던 A.J. 힌치(Hinch) 감독과 제프 르나우(Jeff Luhnow) 단장이 한꺼번에 옷을 벗었습니다. 보스턴 레드삭스의 알렉스 코라(Alex Cora) 감독, 그리고 뉴욕 메츠에서 막 감독직을 시작하려던 카를로스 벨트란(Carlos Beltran)도 한 게임 치러 보기도 전에 쫓겨났습니다. 메이저리그에서 처음 불거진 사인 훔치기(sign-stealing) 사건 때문입니다.

“휴스턴의 2017 월드시리즈 타이틀을 박탈해야 한다.”는 팬들의 온라인 청원운동이 벌어지는 가운데 2018년 월드시리즈 우승팀 보스턴도 같은 혐의로 조사받고 있습니다. 1980년대에도 사인 훔치기 시도가 있었다는 고발까지 이어져 메이저리그는 지금 안팎으로 뒤숭숭합니다.

야구(MLB), 농구(NBA), 미식축구(NFL), 아이스하키(NHL)는 미국의 4대 메이저 스포츠로 각광받는 이벤트들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야구는 ‘내셔녈 패스타임(National Pastime, 국민 여가생활)’이라 해서 각별한 사랑을 받아 왔습니다.

야구 경기를 들여다보면 투수가 볼 하나 던질 때마다 포수와 요란한 사인을 주고받습니다. 먼저 포수가 타석에 들어선 타자의 스타일과 심리상태, 공격 상황 등을 고려해 타자에게 가장 대응하기 어려운 성질의 볼을 던지도록 투수에게 신호를 보냅니다. 그럴 때 포수는 되도록 공격팀이 보지 못하게 가랑이 사이의 수신호로, 혹시 보이더라도 해독하기 어렵게 암호로 볼을 주문합니다. 투수는 포수 주문에 그대로 응하거나 다른 사인을 요구해 자신의 의중이 반영된 구질(球質)을 최종 결정합니다. 그렇게 투·포수 사이에 사전 합의가 없다면 투구(投球) 방향이나 성질을 가늠하지 못해 타자가 배트를 휘두르지 않아도 포수가 볼을 놓치기 십상입니다.

타석에 들어선 타자는 타자대로 공격 진행 상황, 투수의 성향 등을 고려해 투구를 어떻게 공략할지 미리 준비하고 기다립니다. 만일 빠른 직구를 예상했는데 낙차가 큰 커브볼이 떨어지든지 옆으로 빠지는 슬라이더가 들어오면 헛방망이질할 수밖에 없습니다. 타자가 제아무리 기술을 연마하고 머리를 굴려도 투수가 던지는 볼 10개 중 3개 이상을 제대로 맞히기 어렵습니다. 지난해 메이저리그 30개 팀 선수를 통틀어 3할 이상의 타율을 기록한 선수는 19명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 만약 타자가 상대 투수가 던질 볼의 방향이나 성질을 미리 알아낼 수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안타를 때릴 확률, 타율은 크게 뛰어오를 것입니다. 그렇게 투구 정보를 미리 알고 있는 상대를 대적해 이길 수 있는 팀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만약 투수가 특정 구종(球種)을 던질 때 타자가 눈치챌 수 있는 특이한 버릇을 드러냈다거나, 타자가 남다른 예측력을 가지고 있어 남보다 뛰어난 공격력을 발휘했다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팀이 몰래 과학적인 장비를 동원해 상대팀 투·포수 사이의 사인을 훔쳐보고 그 정보를 조직적으로 타격에 이용했다면 이는 대단히 불공정하고 비겁하고 부당한 짓이 됩니다. 야구라는 스포츠의 기본 정신을 기만하는 사기극이 되는 것입니다.

2017년 첫 월드시리즈 우승에 목말랐던 휴스턴은 홈그라운드인 미닛 메이드 파크(Minute Maid Park) 외야에 카메라를 설치해 상대 포수의 사인을 훔쳐보았습니다. 이를 전자기기의 신호나 쓰레기통을 두들기는 등 특이한 제스처로 타자들에게 전달했습니다. 그 덕에 타자들은 상대 투수들을 훨씬 효과적으로 공략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메이저리그가 내놓은 조사 결과입니다.

그해 월드시리즈에서 LA 다저스는 휴스턴과 3승3패로 팽팽히 맞서다가 결국 3승4패로 져 우승을 놓쳤습니다. 그에 앞서 아메리칸리그 결승시리즈에서 휴스턴과 맞붙은 뉴욕 양키스는 3승2패로 앞서가다가 휴스턴에서 연이어 벌어진 6차전에서 1-7, 7차전에서 0-4로 완패해 3승4패로 월드시리즈 진출권을 빼앗겼습니다.

MLB 사무국은 휴스턴의 부당한 플레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르나우 단장과 힌치 감독에게 1년간 자격정지 처분을 내렸습니다. 또 2020년과 2021년 신인 드래프트 1·2라운드 지명권을 박탈하고, 벌금 500만 달러를 부과했습니다. 휴스턴 구단은 이를 이유로 곧바로 두 사람을 해고했습니다.

2017년 당시 휴스턴 벤치코치였던 코라 보스턴 감독도 해고되었습니다. 당시 휴스턴 선수였던 벨트란도 올 시즌 처음 감독으로 팀을 이끌게 되어 있던 뉴욕 메츠와의 계약이 해지됐습니다. 이들이 입게 된 불명예와 금전적 손실도 크겠지만 수천만, 수억 팬들을 속여 메이저리그의 신뢰를 떨어뜨리고, 상대팀에 손해를 끼친 사기극에 대한 MLB의 처벌은 너무 경미하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이번 사건으로 또 한 사람이 여론의 심판대에 올랐습니다. 바로 휴스턴의 사인 훔치기를 폭로한 마이크 파이어스(Mike Fiers, 35)입니다. 그는 2017년 당시 월드시리즈 우승팀 휴스턴 투수였습니다. 그해 12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로 옮겼다가 2018년 8월부터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 몸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11월 인터넷 매체 ‘디 애슬레틱’에 폭탄적인 기사 제보로 오늘의 충격 사태를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그의 MLB 내부 고발은 사인 훔치기라는 부당행위와는 또 다른 일면을 생각하게 합니다.

은퇴하기까지 42세의 최고령으로 21년간 메이저리그 투수로 활약했던 라트로이 호킨스(LaTroy Hawkins)는 이렇게 비판했습니다. “파이어스가 휴스턴에서 뛰던 그 당시에 말했더라면 훨씬 깨끗했을 것이다. 월드시리즈 우승까지 해 놓고 왜 이제 와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가? 그가 정직하다면 사인 훔치기가 일어나고 있을 때 말했어야 했다. 그는 우승 반지와 플레이오프 수입까지 챙겨놓고 함께했던 친구들을 곤경에 몰아넣었다.”

메이저리그의 내부 고발자 파이어스, 그는 과연 불의를 고발한 의인일까요? 메이저리그와 동료들의 명예를 떨어뜨린 악인일까요? 아직까지 그에 대한 포상 소식도 징계 소식도 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뒤늦은 그의 고발에 메이저리그 동료들 가운데서는 비판의 목소리가 작지 않은 것 같습니다.

메이저리그의 사인 훔치기 사태를 지켜보며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부조리와 비리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특히 젊은이들의 공분을 샀던 정유라, 조민의 교육 비리가 생각납니다. 본인과 관계인들은 합법을 주장했지만 누가 보아도 불공정하고 부당한 비리의 표본이었습니다. 동시에 대선 판세를 뒤집었던 김대업, 대통령 탄핵을 불렀던 고영태의 고소, 고발도 생각납니다. 그로 인해 유리해진 쪽에서는 의인으로 불렀지만 많은 사람들은 보상을 노리거나 제 허물을 호도하기 위한 사기극의 주역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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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방석순

스포츠서울 편집국 부국장, 경영기획실장, 2002월드컵조직위원회 홍보실장 역임. 올림픽, 월드컵축구 등 국제경기 현장 취재. 스포츠와 미디어, 체육청소년 문제가 주관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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