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동이 형 [한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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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동이 형

2020.01.20

요즘은 결혼 적령기가 남자가 36세, 여자가 33.4세라고 합니다. 1990년대에만 해도 남자가 28.3세 여자가 25.9세였습니다. 결혼 적령기가 1990년대보다 남자 기준으로 7.7세 늘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1960년대에는 남자 결혼 적령기가 26.4세였습니다. 그 시절에는 나이 30세가 넘도록 결혼을 안 하면 ‘노총각’, ‘노처녀’라 불렀습니다. 노총각, 노처녀는 신체적으로 하자가 있거나, 집안에 문제가 있는 시선으로 보는 경향이 짙었습니다.

장터 귀퉁이에 송판으로 얼기설기 지어 놓은 작은 창고 같은 건물이 있었습니다. 창고 안에는 기름을 짜는 기름틀이며, 참깨며 들깨를 볶는 가마솥, 장작이나, 기름을 짜서 담아가는 됫병짜리 빈 소주병, 깻묵이 들어 있는 포대들이 쌓여 있습니다.

장날이면 다른 동네에 사는 부부가 와서 아침부터 깨 볶는 냄새를 풍기며 기름을 짰습니다. 창고 안에는 어른이 누우면 딱 맞을 크기의 방이 있었습니다. 아주머니나 노인들이 기름을 짜는 동안 낮잠을 자거나, 쉬는 곳입니다.

그 창고에 어느 날부터 서른 살이 넘는 노총각이 살기 시작했습니다. 노총각은 기름 창고 근처에 사는 자전거포 주인의 먼 친척으로 알려졌을 뿐 부모나 형제들이 없습니다. 자전거포에는 초등학교 3학년짜리 남자가 있었는데 노총각을 시동이 형이라고 불렀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짜리가 시동이 형이라고 부르니까 5학년인 우리 또래는 물론이고, 이제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아이도 시동이 형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시동이 형은 애 어른 할 것 없이 '시동아!' 가 아니면 '시동이 형'이라고 불러도 화를 내지 않고 바보스러울 정도로 웃었습니다. 어눌한 말투는 좀 모자란 사람처럼 보이지만, 행동거지는 멀쩡해 보였습니다.
“시동이 형, 깻묵 좀 줘.”
“참깻묵 줄까? 들깻묵 줄까?”
시동이 형은 깻묵이 마치 자기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어린 조카를 대하듯 반갑게 웃으며 깻묵자루를 벌렸습니다. 아저씨뻘 되는 분을 형이라고 부르면 나이가 갑자기 들어 버린 것처럼 괜히 어깨가 치켜 올라가고, 기분이 뿌듯했습니다.

시동이 형은 손재주가 좋아서 아이들에게 새총을 만들어주기도 하고, 대나무를 구해서 물총을 만들어주기도 했습니다. 봄날 나무를 해 오는 날은 진달래를 한아름 꺾어 와서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며 즐거워하기도 했습니다.

여름에는 양동이와 삽을 들고 냇가에 고기를 잡으러 갈 때 데리고 가기도 합니다. 우리들에게 웅덩이의 물을 푸게 하거나, 풀숲에 양손을 집어넣어서 맨손으로 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쳐주기도 했습니다. 운이 좋아서 미꾸라지나 메기며 뱀장어를 많이 잡는 날은 가게를 열고 장사하는 집에 가서 그것을 팔았습니다. 물고기를 판 돈으로 아이스크림을 사서 나누어 주거나, 과자를 사 주기도 했습니다.

요즘은 시골에 살아도 저만 부지런하면 일거리가 많습니다. 그 시절에는 일을 하고 싶어도 일거리가 없었습니다. 농사일의 품삯도 새마을 담배 한 갑에 그때 돈 이천 원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지만 시동이 형이 남의 집 일을 해 주는 모습은 보지 못했습니다. 가끔 외지에 며칠씩 나갔다 들어오고는 했는데 그때마다 아이들에게 과자를 사주거나 껌이며 풍선 같은 걸 사주기도 했습니다. 훗날 생각해 보니까 외지에 며칠 씩 나가 있을 때는 노동판 같은 곳에서 일을 했던 것 같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까지만 해도 시동이 형이 사는 창고에 가끔 놀러가기도 했습니다. 3학년이 되고 고등학교 입학시험에 매달리고부터는 시동이 형하고 시간을 보낸 적이 없었습니다. 가끔 장터에서 만나면 시동이 형이 먼저 알은 척을 합니다.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시동이 형 근처에는 아이들이 붙어 다닐 때가 많았습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시동이 형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머니한테 물어 보니까 동네에서 먼 산골짜기에 있는 외딴집에 혼자 살고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방학입니다. 친구가 갑자기 시동이 형을 보러가자고 했습니다. 시동이 형이 사는 곳은 깊은 산골이었습니다. 국도에서 계곡을 따라 시오리 길을 걸어 들어가니까 시동이 형이 사는 집이 보였습니다. 그 시절 무장공비 출현으로 외딴집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동네로 이주를 시켰습니다. 시동이 형은 집주인이 이주해 간 집에서 혼자 살고 있었습니다.

마당 앞으로 가니까 개들이 요란하게 짖기 시작했습니다. 시동이 형이 부스스한 얼굴로 방에서 나왔습니다. 요즘 모 텔레비전 프로에 나오는 자연인처럼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외딴집에 사는 시동이 형은 무척 건강해 보였습니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이 나이가 먹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줄 뿐이었습니다.

시동이 형은 우리를 예전처럼 반겨주었습니다. 저는 불과 3년 못 본 사이에 시동이 형이 부쩍 나이가 들어 보여서 거리감이 생기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색하게 웃으며 시동이 형이 권하는 대로 방에 들어갔습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방은 움막처럼 어두웠습니다.

시동이 형은 먼 길을 걸어온 우리들이 너무 고마웠던지 닭을 잡아주겠다고 나섰습니다. 우리는 얼굴 봤으니까 됐다고 만류를 했지만 결국 닭을 잡아서 닭볶음탕을 만들고 직접 담근 동동주까지 내 왔습니다.

“옛날에는 니덜 나이에 장가도 갔구먼. 고등학교 안 다녔으면 어른들하고 술 마실 나잉께 한잔씩 햐.”
그 즈음 숨어서 소주잔을 기울였던 우리들은 못 이기는 체 술잔을 받았고, 그렇게 술판이 시작됐습니다. 서산의 해는 50대 어른과 대작을 하는 소년들을 보고 빙긋빙긋 웃다 지쳐 산 너머로 가 버렸습니다. 마당에 모깃불이 켜지고 방을 등잔불이 밝힐 무렵 친구가 조금은 취한 목소리로 “시동이 형은 왜 혼자 사느냐”고 물었습니다.

“내 팔자가 그렇지, 뭐.”
시동이 형은 소리 없이 웃으며 술잔을 기울였습니다. 술잔을 내려놓는 얼굴에 등잔불이 어른거리는 모습이 무척이나 외로워 보였습니다. 앞으로 시간을 내서 자주 놀러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 밤 시동이 형이 경운기로 국도까지 우리를 태워다줬습니다. 가로등도 없는 어둠속에서 시동이 형하고 헤어졌습니다. 그 이후로 거짓말처럼 시동이 형을 잊고 살았습니다. 제 나이가 그날 밤 시동이 형 나이쯤 됐을 때입니다. 중학교 동창이 시동이 형이 살던 곳으로 귀촌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야 시동이 형의 얼굴이 생각났습니다. 시동이 형은 제 어린 시절의 키다리아저씨 같은 존재였지만, 저는 까맣게 잊고 살았다는 생각에 갑자기 쓸쓸한 바람이 부는 것 같았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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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한만수

1990년부터 전업으로 소설을 쓰고 있음. 고려대학교 문학석사. 실천문학 장편소설 “하루” 등단. 대하장편소설 “금강” 전 15권 외 150여권 출간. 시집 “백수블루스”외 5권 출간. 이무영문학상 수상. 장편소설 “활” 문화예술진흥위원회 우수도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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