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무게를 생각하는 새해이길 [이성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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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무게를 생각하는 새해이길

2020.01.03

달력 한 장 넘기며 새해를 맞이합니다. 다시 옷깃을 새롭게 여미게 됩니다. 그런데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 검은 그림자와도 같이 펼쳐졌던 사회의 갈등하는 모습이 덮쳐옵니다. 그 중심에는 지난 역사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에서 비롯된 품위 없는 논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겨울철에 우리나라를 찾아온 한 동남아 여행객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공항에서 자동차를 타고 서울 시내로 들어오던 중 그 여행객이 이렇게 물어보더랍니다. “왜 한국 산야에는 ‘죽은 나무’가 이리도 많습니까?” 동행한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맥을 못 잡고 어깨를 으쓱하자 그 여행객이 “저 말라버린 나무 잎사귀…” 하며 앙상한 겨울 수목을 가리키더랍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는 사계절 늘 푸른 잎의 사철나무가 있는가 하면, 겨울잠을 자는 나무도 있다고 설명했더니 기연가미연가하며 의심의 눈길을 못 버리더랍니다.

이 에피소드를 들으며 늘 푸른 열대 지역의 수목만을 대해온 그 여행객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모르면 이런 오판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약간 섬뜩해지면서 근래 우리 사회에서 새롭게 진행되고 있는 과거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움직임이 떠올랐습니다.

근대 세계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장면’ 하면 필자는 서슴지 않고 나치 독일이 자행한 유대인 대학살, 즉 홀로코스트(Holocaust)를 꼽습니다. 이 어두운 역사의 현장은 독일 국내는 물론 유럽 곳곳에 산재합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방문자의 눈에 들어와 뇌리에 박히는 ‘단골 문구’가 있습니다. 바로 “과거를 기억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과거를 되풀이하고 말 것이다(Wer sich seiner Vergangenheit nicht erinnert, ist dazu verdammt, sie zu wiederholen)”라는 경고 메시지입니다.

필자는 이 문구가 분명 홀로코스트 캠프에서 살아남은 어느 유대인이 우리에게 전하는 교훈이려니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훗날 스페인 태생의 미국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George Santayana, 1863~1952)의 글을 인용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저런 문헌을 읽으며 그의 학문적 깊이에 존경의 마음이 더해가던 무렵, 역사의 현장을 이론적으로 접근할 경우 엄청난 괴리(乖離)가 유발될 수도 있다는 점을 극명하게 일깨워주는 산타야나 교수의 생각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건 “그런 일은 절대 발생하지 않았다는, 현장에 없었던 자들의 진술은 역사의 거짓 덩어리이다(History is a pack of lies about events that never happened told by people who weren’t there)”라는 문장이었습니다.

오늘 이를 필자 나름의 다른 시각에서 풀이하며 “그 역사의 현장에 없었던 자들이 훗날 ‘그런 일이 분명 있었다고 진술하는 것’도 역사의 거짓 덩어리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아울러 산타야나 교수의 이 말은 요즘의 우리 사회에 던지는 송곳 같은 훈시가 아닌가 싶습니다.

교수의 말을 반추하며 필자는 역사의 시공간에서 과거와 현재는 엄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됩니다. ‘어제라는 역사 공간’을 ‘오늘이라는 시각과 시점’에서 해석하려면 대단히 조심스러운 접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거듭하였습니다. 즉 역사가 갖는 무거운 준엄성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필자는 반세기 전인 1960년대에 독일 학우들과 대화를 하며 고개를 갸웃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이 나치 독일의 만행을 포함한 근·현대사를 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 배우지 않았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당시는 ‘부끄러운 역사를 그냥 숨기고 싶은 심정’이려니 생각하며 넘어갔습니다. 필자의 경우 고등학교 때 한국전쟁에 대해 배웠던 것을 떠올리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훗날 새로운 사실을 알았습니다. 필자의 학우가 말한 것처럼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에서는 중·고교 교육과정 때 현대사를 국가 교육 정책 차원에서 가르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역사라는 시공간에서 시차가 너무 짧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역사를 가르쳐야 할 담당 교사들이 모두 나치 정권하에서 교육을 받았고, 자칫 그 나치 정신을 가르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1990년 통일된 독일에서는 역사 교육, 특히 동독 지역의 학교에서는 한 세대가 지나는 동안 ‘공산당’ 운운하는 역사 교육을 배제했다고 합니다. 한 시대의 이념 교육에 젖은 교사에게 역사 교육을 맡기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필자는 여기서 한 국가의 차원 높은 교육 정책을 보았습니다. 교육철학이 지니는 사회적 책무가 무엇인지도 새삼 느꼈습니다.

육중하기만 한 ‘역사의 무게’를 생각하면서, 근래 우리 사회가 지난 역사, 특히 근대사에 대해 너무 쉽게 접근하는 모습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지켜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가 현대사인 경우, 시간과 거리를 두고 접근하면 좀 더 품위 있는 논의의 장으로 이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역사가 경외(敬畏)의 대상이라는 것은 동양과 서양이 다르지 아니하고, 어제와 오늘이 다르지 않은 만고의 진리라는 사실을 떠올리면서 2020년 새해에 간절한 단상을 가져보게 됩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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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이성낙

뮌헨의과대 졸업. 프랑크푸르트대 피부과학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
현재 가천대 명예총장, 전 한국의ㆍ약사평론가회 회장, 전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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