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로 감퇴하는 기억력과 순발력 [황경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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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로 감퇴하는 기억력과 순발력

2019.12.13

한 해를 되돌아보는 연말이 되었습니다. 열한 달의 세월이 훌쩍 지나가고 20일도 안 되어 경자(庚子) 새해가 시작됩니다. 이때쯤 되면 으레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한 해’라는 판에 박힌 말이 모임이나 언론 등에서 등장합니다. 2019년은 한반도와 일본 열도에 막대한 피해를 남기고 간 때 아닌 가을 태풍, 로스앤젤레스의 주거지까지 위협한 장기간의 산불, 그리고 반년에 가까운 홍콩의 시위소동 등 국내외로 큰 뉴스가 많았습니다.

기해(己亥)년은 저 개인으로서도 오래 기억에 남을 한 해였습니다. 지난해에 통풍, 척추관 협착증 등으로 건강에 적신호가 나타나 자유로운 외출을 못 하던 상태에서 해가 바뀌자 이번에는 고령자에 치명적이라는 폐렴(肺炎)에 걸려 90평생 두 번째 입원 치료까지 받았습니다.

다행히 5~6년 전에 맞은 폐렴 예방주사 덕분인지 1월 하순에 입원했다가 설 명절 직전에 퇴원할 수 있었습니다. 입원 중 여러 검사를 거쳐 16가지 약 처방을 받아 투병생활을 계속했습니다. 3개월 후부터는 약의 가짓수가 반으로 줄었고, 휠체어에만 의지해 외출하다가 지금은 보행보조기도 가끔 쓸 정도로 보행 능력도 향상되었습니다.

컴퓨터 앞에 앉아 글 쓰는 것도 무리하면 한 번에 1시간 정도는 버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가장 걱정인 것이 기억력과 머리의 순발력이 날로 감퇴(減退)해 가는 현상입니다. 금년 초 입원했을 때 세밀한 치매검사도 받았습니다. 퇴원한 후 장애인 등급을 받을 때도 간단한 치매검사를 받았고, 지역 요양서비스 제공센터 두 곳에서 요양보호사의 파견을 받기 위해서도 간단한 치매검사를 받았습니다. 기억력에 약간의 문제는 있지만 치매 판정을 받을 정도는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저 자신의 생각으로도, 근래에 와서 기억력이 몇 해 전보다 너무나 떨어진 것을 느낍니다.

일제강점 시 보통교육은 지금 생각하면 암기 중심이었습니다. 다행히 어릴 때 제 기억력은 꽤 좋았습니다. 초등학교에서는 별로 느끼지 않았지만 중학교에 입학한 뒤 수학의 공식이나 화학의 원소치(元素値) 등 무조건 암기해야 할 것이 교과서뿐 아니라 그 외에도 무척 많았습니다.

광복 후 우리 집 아이들이 조선조(朝鮮朝) 임금 이름을 암기하는 것을 보고, 일제강점 시 중학에서 124대나 되는 일본 천황 이름을 암기했던 기억이 생각났습니다. 지금도 한 20대 정도는 외우고 있는 그 이름들이 사회생활에서 무슨 역할을 했는지 궁금합니다.

전시체제가 강화되면서, 교과서 외에 암기해야 할 것이 더욱 많아졌습니다. 일본의 오래된 봉건체제를 타파하고 근대화 유신을 이룩한 메이지(明治) 천황의 ‘교육칙어’(敎育勅語)는 일본 근대교육의 기본 틀을 만든 것으로, 중요한 학교 행사가 있을 때마다 교장이 꼭 ‘봉독’(奉讀)했습니다. 학생들은 이 긴 ‘칙어’를 암기해야 했습니다. 이밖에 ‘황국신민(皇國臣民)의 서사(誓詞)’, 전진훈(戰陣訓) 같은 것도 암송해야 했습니다. 중학교(지금의 고등학교) 교가는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으며, 선배들로부터 배운 당시 유행가라 불리던 우리말 노래 몇 곡도 아직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 기억력이 얼마 전부터 저 자신이 놀랄 정도로 떨어진 것입니다. 그와 함께 머리의 순발력도 무척 둔해졌습니다. 명동, 종로, 효자동 등 자주 쓰고 일상 회화에 많이 오르는 동네 이름은 머리에 바로 연상이 됩니다. 그러나 문래동, 화곡동, 전농동 등 자주 듣지 않는 동네 이름은 듣는 즉시 머리에 와 닿지 않아 그 동네가 서울의 어느 동 이름인 것은 생각이 나나 어디에 있는 마을인지 한참 있다가 감이 잡히는 일이 종종 생깁니다.

외국 지명인 경우는 머리에 와 닿는 시간이 더 걸립니다. 위구르, 그루지아(조지아), 아제르바이잔 등의 단어가 방송에서 흘러나올 때 이를 감지하는 능력이 과거보다 훨씬 둔해진 것을 나이 탓만으로 돌릴 것이 아니라고 걱정할 때가 많습니다.

몇 년 전 일기 쓰기를 다시 시작한 이유 중 하나가 자꾸만 잊혀가는 한자(漢字)를 되도록 기억에 남기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잠자리 들기 전에 일기를 쓰는 습관은 완전히 회복되었는데, 한자 기억력은 점점 줄어들어 조금 전에 생각났던 한자도 쓰려고 하니 기억에서 사라져, 그저 쉬운 대로 한글로 써 버릴 때가 많습니다. 책을 읽을 때 나오는 한자는 잘 이해하면서 왜 이렇게 쓰려고 하면 기억에서 사라지는지 답답할 뿐입니다.

그러나 지난 한 해를 되돌아볼 때, 연초 병원에 입원했을 때에 비해 체력과 기력도 믾이 회복되고 식욕도 어느 정도 돌아왔습니다. 이 독거노인을 돌보는 여섯 아이들의 부담도 영양보호사의 파견근무로 약간 가벼워졌습니다. 새해 경자년은 쥐띠인 저의 해입니다. 위기를 포착하고 민첩하게 움직이는 기민성을 습득하여 ‘100세 인생’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지며 새로운 희망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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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황경춘

일본 주오(中央)대 법과 중퇴
AP통신 서울지국 특파원, 지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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