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이 조금 부족했던 안군은 어떻게 하버드에 합격했을까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아무튼, 주말- 김형석의 100세 일기]

     미국 버지니아주에 사는 한국 가정이 있다. 그 집 아들 E군은 성적이 우수한 모범생이었다. 흠잡을 데 없을 정도로 잘 자랐다. 고교를 졸업하면서 미국 동북부에 있는 하버드대, 예일대 등에 입학원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네 대학 모두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버지니아주립대로 갔다.

일러스트= 이철원

또 한 학생은 프로비던스에 사는 내 제자 안 교수의 아들이다. 학교 성적은 E군만은 못 하지만 정구 선수로 친구들을 가르칠 정도였다. 미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고교 때 학생회장이었고 독서를 즐기는 모범생이었다. 교회에 다니면서 봉사활동에도 참여했다. 안군은 세 대학에서 입학이 허락되었는데 하버드대를 선택했다.




누군가가 하버드대에 "왜 성적이 더 우수한 E군보다 안군을 택했느냐"고 묻는다면 어떤 설명을 했을까. 아마도 이렇게 답할 것이다. "고등학생이 지금 어느 정도 지식을 갖고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 대학이 원하는 학생은 장차 사회의 지도자가 될 유능한 인물이다. 성적은 A급이면 충분하고, 어느 정도 예술성을 갖추었는가도 중요하다.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리더십의 유무도 살펴야 한다. 건강도 필수조건이지만 봉사정신도 있어야 한다. 성적은 그 여럿 중 하나일 뿐이다."

요사이 우리는 대통령까지 앞장서 대학 입시의 공정성을 걱정한다. 무엇을 위한 공정성인가 물어야 한다. 수능시험의 석차도 중하다. 그러나 기억력 위주의 수능시험이기 때문에 대학생활의 필수조건인 이해력과 사고력을 측정하기는 어렵다. 학문적 성공을 위해서는 주어진 목표를 성취할 창의력이 앞서야 한다. 입시 성적으로는 창의력을 측정하기 어렵다. 그래서 수능시험에서 A급이던 학생이 졸업 때는 C급으로 떨어지고, C급이던 학생이 A급으로 올라가는 경우도 많다. 인간 평가의 공정성은 현재의 지식 평가로 끝나지 않는다.



더 큰 문제는 백년대계의 대학 교육을 대통령이 직접 지시하고 한 달 후에 교육부 장관이 정책을 발표하는 선진국은 어디에도 없다는 점이다. 교육은 교육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 대학은 무엇보다도 자율성이 필요하다. 영국의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대학은 어떤 정권보다 국가적 공헌이 앞섰다. 정신적 지도력과 인재를 산출했기 때문이다. 물론 일부 자질이 부족한 교육자와 학부모가 반(反)교육적 욕심으로 아들·딸을 '양심의 전과자'로 만드는 우를 범했다. 교육의 정도를 권력층이 악용하는 불행한 사례가 있었다. 그런 사회악은 제재해야 한다.

그러나 '구더기 무서워 장을 못 담근다'면 식생활 전체가 버림받는다. 선으로 악을 극복하는 역사의 과정은 정권 5년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공정한 사회는 정의를 위하는 의무와 희망에 국민 전체가 동참해야 가능하다. 정권이 아닌 학생들의 인격과 국가의 장래를 위한 교육계 전체의 협력에서 이루어진다.



교육은 정부의 행정에 맞추는 것이 아니다. 장차 국가를 이끌어 갈 지도자를 육성하는 것이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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