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바뀐 말 [김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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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바뀐 말

2019.11.08

일상의 언어생활에서 누구나 한 번쯤 저질렀을 법한 ‘순서의 잘못’을 채집(採集)해 소개합니다.

# “문 닫고 나가라!”

소싯적 촌에 살 때 가끔 들었던 말이지요. 날이 추워 바람 들어올 기미가 보인다거나, 아버지나 집안 어른이 주무실 때라든가. 그런데 문을 닫았는데 어떻게 드나든단 말인가요? 아, 창으로 나가든지 벽을 부수거나 통과해 나가면 되겠군요. 그 옛날 시골 집 창이나 벽이 다른 시공간으로 통하는 접속 장치라도 되는 것인지?

세월이 흘러 엔간한 집엔 가족 구성원 각자의 방이 있고 말 안 해도 문 잠그고 자신을 가둡니다. 자녀들이 끔찍이 싫어하는 일 중 하나는 아버지가 방문을 벌컥 열어젖히는 것입니다. 청소년 은어로 ‘파덜어택(Father attack)’이라고 하죠. 위 표현이 사용되는 상황이라면 결코 우호적인 분위기는 아닐 거예요. 속내를 들춰봅니다.
“좋게 말할 때 문 닫고 꺼져주실래요?”

# “남편과 만나서 결혼하고 세상이 달라졌다.”

위에 든 예처럼 앞뒤가 뒤바뀐 말법이에요. 혼전에 어떻게 결혼도 안 한 남편을 만났다는 것인지? 혹 속도위반? 아니면 유부남과 결혼했다는 것인지? 어떤 사람은 대놓고 고백, 아니 자랑 아닌 자랑을 합니다.
“남편과 만나서 결혼하고 그때부터 내 인생이 꽃피기 시작했다.”
백 번을 양보하더라도 아래처럼 말해야 조금은 신빙성이 있는 것 아닐는지요?
“지금의 남편과 만난 후 그때부터 내 인생이 엇나가기 시작했다.”

결혼 이야기가 나왔으니 맥락은 다르지만 또 다른 사례를 소개합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그 사람하고 결혼만 안 하고 만났더라도 내 인생이 달라졌을 텐데.”
얼핏 결혼한 것을 후회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면 알고 지내는 것은 괜찮지만 결혼이라는 제도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구속과 자유 제한은 싫다는 것인지? 역시 뜻이 모호하긴 마찬가지군요.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관계도 아닐 텐데.

#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고아로 태어나….”

대학교 다닐 때니까 1960년대 후반, 좌석버스가 선을 보인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무렵이었어요. 그때 버스에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겁을 주고 물건을 강매하는 앵벌이들이 있었어요. 검, 볼펜, 신문 등속을 팔았죠. 처음은 정해진 식순과 레퍼토리에 의거,
“00번을 이용하시는 민주 애국시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같은 깍듯한 말로 예의를 차렸죠. 이어 구성진 목소리로 노래를 한 곡조 때렸습니다.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엔~/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

노래로 분위기를 띄우거나 가라앉힌 후 비감한 목소리를 짜내어 물건 강매를 위한 사전 조치로 자기소개 겸 신세타령을 늘어놓기 마련이었습니다. 내용인즉슨 어린 나이에 이 계통에 발을 들여놓고 성실히 봉사하던 중, 뜻하지 않게 특수 업무에 연루되어, 주역은 아니었으나 단지 음주가무 현장에 찬조 출연했다는 구실로 함께 딸려가, 서대문국립학교에 입학했다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특수 전문 용어인 ‘계통(폭력조직)’ ‘특수 업무(이권다툼)’ ‘음주가무 현장(룸살롱)’ ‘찬조 출연(망보기’) ‘국립학교(교도소)’ 등은 대충 감을 잡겠는데 이해가 안 되는 대목이 있었지요. 고아이긴 한 모양인데, 도대체 어떻게 부모를 잃고 난 후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인지? 어쨌거나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같은 엄혹한 시대상황과 어우러져 그 시절 대중들의 마음을 헤집은 노래인 만큼 한 구절 더 감상하죠.
"가랑잎이 휘날리는 산마루턱을~/넘어오던 그날 밤이 그리웁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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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창식

경복고, 한국외국어대학 독어과 졸업.수필가, 문화평론가.
<한국산문> <시에> <시에티카> <문학청춘> 심사위원.
흑구문학상, 조경희 수필문학상, 한국수필작가회 문학상 수상.
수필집 <안경점의 그레트헨> <문영음文映音을 사랑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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