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벽 아파트 주인과 공공 미술관의 다툼 [허찬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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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벽 아파트 주인과 공공 미술관의 다툼

2019.10.21

강변 경관 조망을 위해 벽이 유리로 마감된 비싼 고층 아파트에 사는데 바로 옆 미술관 관람객들이--그것도 무료로 입장한--집안을 기웃기웃 본다면 어떨까요? 영국 런던에 위치한 세계적 현대 미술관인 테이트모던(Tate Modern) 바로 옆 고가 아파트 주민들이 몇 년 전 사생활 침해로 미술관을 고소했던 송사(訟事)가 올해 2월에 마무리되었습니다. 필자도 런던에 갈 때마다 찾았던 테이트모던의 그 전망대에서 문제의 아파트 내부가 눈에 들어와 난감한 느낌이 드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 송사가 흥미로웠습니다. 일견 입주민의 일종의 사유재(私有財)라 할 수 있는 사생활 보장권과 미술관이 제공하는 무형 공공재(公共財, public services) 간의 충돌이라고 보아 복잡한 다툼이 될 수도 있는데, 판사는 아파트 주인에게 커튼을 치라는 취지의 간단명료한 패소 판결을 내렸습니다.

테이트모던은 소장한 작품과 이어지는 좋은 특별전뿐만 아니라 도시 재생 분야와 관련해서도 유명합니다. 1950년대 초부터 1980년대까지 런던 시내에 전력을 공급했던 뱅크사이드 화력발전소(Bankside Power Plant) 거대한 벽돌 건물이 미술관으로 탈바꿈해 2000년 개관한 후 10여 년 만에 수많은 방문객들로 붐비는 런던의 명소가 되었습니다. 이 지역은 런던 중심지와 템스 강을 사이에 두고 강 남안에 위치해 있으나 오랫동안 강북 이웃과 대조되는 변두리 지대였습니다. 방직공장과 양조장 같은 제조업, 술집과 매춘, 범죄로 알려진 어두운 곳이었으며, 19세기 작가 찰스 디킨스가 당시의 비참한 사회상을 그린 소설들의 배경이 되었던 곳입니다. 셰익스피어가 대본을 쓰고 연극을 공연했던 글로브 극장도 테이트모던 가까이 위치해있습니다. 과거 연극의 사회적 위상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20세기 들어 점점 윤택해져 간 강 건너 런던 금융가와 도심과는 정반대로 이 지역은 주변 공장들이 문을 닫으며 쇠락해 갔고, 1981년 발전을 멈춘 이 거대한 벽돌 건물은 이 지역 재생의 걸림돌이 되었죠. 하지만 애물단지의 미술관 변신은 낙후 도심 지역 변신의 기폭제가 됩니다. 그 시발점은 1980년대 말 테이트미술재단 산하의 런던 소재 테이트영국미술관(Tate Britain) 소장 작품이 넘쳐 1900년 이후의 영국 및 외국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할 새로운 미술관 자리를 물색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뱅크사이드 발전소의 위치와 완전히 신축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 부각되어 새 미술관 건물로 선정됩니다.

대형 발전기가 거치된 건물을 전시공간으로 바꾸는 작업 자체가 큰일이었는데 디자인 공모에서 채택된 스위스 건축가 헤르초크와 드 뫼롱(Herzog & De Meuron)의 설계에 따라 대폭 개조한 후 현재의 모습으로 2000년에 개장하었습니다. 그 이후 테이트모던은 세계적인 미술관으로 급부상하는 동시에 런던의 명소로 자리매김하며 방문객의 행렬이 이어지는 곳이 되었습니다. 개장 시기에 미술관 앞 광장과 템스강 북안을 연결하는 보행자 전용 밀레니엄교(橋)의 개통도 테이트의 성황에 일조했습니다. 이런 성공에 힘입어 얼마 후 미술관은 기존 건물의 남쪽에 남아있던 건물 자리에 새로운 전시관을 건립합니다. 새 건물은 약 10년 만에 총공사비 2억6천만 파운드의 상당 부분을 지원한 기업인 후원자의 이름을 딴 블라바트니크관(Vlabatnik館)으로 2016년 개관합니다. 신관의 설계도 본관 설계자들이 담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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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밀레니엄교에서 본 테이트모던의 앞 모습, (우) 테이트모던 뒷 모습, 블라바트니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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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건물 입주자들과의 문제의 발단은 바로 이 블라바트니크관 10층의 전망대였습니다. 옆 아파트(NEO Bankside)와의 직선거리는 30미터 정도입니다. 이 전망대를 따라 건물을 한 바퀴 돌면 런던의 360도 경관을 볼 수 있습니다. 고층 건물이 드물고, 특히 일반인이 쉽게 접근하여 높은 위치에서 런던의 경관을 볼 수 있는 곳이 없기 때문에 이 미술관의 신관 전망대가 관람객들에게 더 인기 있는 것 같습니다. 일반인이 높은 곳에서 런던을 조망할 수 있는 다른 곳은 적지 않은 입장료를 내야 하는 런던아이와, 테이트모던 강 건너편의 세인트 폴 대성당 전망대가 대표적입니다.

비싼 유리벽 아파트(시가 2백만~4백만 파운드, 한화로 약 30억~60억원) 주민은 미술관에 오는 사람

문제의 유리벽 아파트와 미술관이 전망대 방문객들에게 이웃 유리벽 아파트 주민들의 사생활 존중을 주문하는 표지판

들이 자신들의 사생활을 엿보기 위해 온다는 자기중심적 피해망상이 들만도 합니다. 아파트 주인 4명이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하지만 그 전망대에서는 아래의 사진과 같이 탁 트인 런던의 전경을 볼 수 있어 대부분 전망대 관람객들에게 아파트 내부가 아니라 쉽게 보기 어려운 넓은 런던의 전경이 구경거리인 것입니다. 더욱이 아파트 주민이 사생활 보호를 위해 주택 가격에 비해 매우 작은 비용으로 외부에서 보이지 않도록 차단할 수 있습니다. 작년 테이트모던은 방문객 수가 5백 90만 명을 기록하여 오랫동안 영국 내 최다 방문객 수를 기록해왔던 대영박물관(British Museum)보다 10만 명이 더 많았다고 합니다. 아파트 몇 채가 투명 통유리 외벽을 손대지 않아도 되도록 수많은 전망대 관람객들의 시선을 가리도록 요구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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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층 전망대에서 본 템스 강과 시가지 파노라마 경관. 사진의 왼쪽 끝에 유리벽 아파트가 보임. 이와 비슷한 경치를 전망대 4면에서 조망할 수 있음

소송을 맡은 판사가 직접 두 곳을 찾아 현장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소송을 제기한 원고들에게 ‘커튼을 다세요’라는 명쾌한 패소 판결을 내렸습니다. 다수의 행복을 중요시하는 영국 철학자 제레미 벤담(1748-1832)의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이 결론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상식적 수준에서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자구책을 강구할 수 있는 유리벽 아파트 주인들의 요구는 터무니없어 보입니다. 더 냉소적인 경제학적인 해석을 한다면 이 사람들이 이미 고층의 미술관이 있는 인근에 유리벽 건물을 지어 살면서 절대적 사생활 보호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는데 그 대가를 지나치게 싸게 후려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적정한 가격은 아마도 미술관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겠다고 동의할 수준의 가격(몇 천억 파운드?)을 제시해서 유리벽 건물만 그 동네에 남아 있게 하는 것이 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막상 그렇게 되면 테이트모던이 더 이상 인근에 없기 때문에 오히려 아파트 값은 떨어질 거라 생각됩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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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허찬국

1989년 미국에서 경제학 박사학위 취득 후 미국 연지준과 국내 민간경제연구소에서 각각 십년 넘게 근무했고, 2010년부터 2019년 초까지 충남대 무역학과 교수로 재직. 다양한 국내외 경제 현상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것이 주된 관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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