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가슴을 흠뻑 적시다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나 같아”… 중년의 가슴을 흠뻑 적시다

주철환 아주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노래채집가


최백호 ‘낭만에 대하여’


    ‘어떤 사랑은 이별로 끝나지만/ 어떤 사랑은 이별 후에야 비로소 시작된다’(양광모의 시 ‘나는 배웠다’ 중). 노래세상은 어떨까. 어떤 노래는 녹음실이 곧 영안실이다. ‘가요 톱10’에서 끝난 것도 많지만, 지금까지 가슴을 타고 번지는 노래도 적지 않다. 태어나자마자 사라지는 노래가 태반인 살벌한(?) 동네지만 한편에선 죽은 줄 알았던 노래가 다시 살아나는 기적도 간혹 발생한다. 노래의 부활은 과연 누가 언제 어디서 주도할까.





좋은 사람은 혼자 차지하고 싶지만 좋은 노래는 함께 즐기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노래의 탄생과 부활 사이에서 교량 역할을 하고 싶다면 영향력을 가져야 한다.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로 시작하는 김국환의 ‘타타타’가 인기드라마 ‘사랑이 뭐길래’(MBC)를 통해 ‘해동’됐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다. ‘궂은 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로 시작하는 최백호(사진)의 ‘낭만에 대하여’ 역시 동일한 작가의 파급력이 작동한 예다. ‘목욕탕집 남자들’(KBS)을 집필하던 작가 김수현이 승용차 안에서 라디오를 들은 게 발단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라디오는 ‘노사정’(노래, 사연, 정보)의 결집체다.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대작가를 소녀로 되돌린 라디오의 그 노래는 곧바로 TV 드라마 속 인물(장용)의 입을 통해 구연됐고 급기야 세상의 수많은 첫사랑 소녀, 소년들의 가슴을 추억으로 물들게 했다.





‘낭만에 대하여’는 주방에서 음식을 만드는 아내의 모습이 계기가 됐다고 최백호가 인터뷰에서 밝힌 적이 있다. 현실의 아내를 보며 ‘실연의 달콤함’을 떠올린 대담한 창의력도 경이롭지만 그 상상이 폭발력을 가진 데는 그 나이가 돼야만 비로소 가늠할 수 있는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이 잃어버린 것에’ 중년들의 공감대가 달아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낭만에 대하여’의 단초가 첫사랑 아닌 아내란 것도 뜻밖이지만 데뷔곡인 ‘내 마음 갈 곳을 잃어’의 대상도 연인이 아니라고 밝혀서 팬들은 놀랐다.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낙엽 지면 서러움이 더해요’. 최백호를 ‘가을의 연인’으로 만든 이 노래에서 가을에 떠난 사람은 연인이 아니라 어머니였다. “가을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그리워 노랫말을 썼죠.” 알고 보니 최백호는 ‘가을의 연인’이 아니라 ‘가을의 효자’였던 셈이다. 애초에 그가 시로 썼을 때는 제목이 ‘가을에’였다. 태어난 지 5개월 만에 부친은 돌아가셨고, 초등학교 교사였던 어머니는 틈틈이 시를 썼다. 그의 작품이 지닌 문학의 향기는 어머니의 선물인 셈이다.


그는 가족애가 강하다. 어머니, 아내에 이어서 딸에 대한 노래도 발표했다. ‘아장아장 걸음마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자라 내 곁을 떠난다니/ 강처럼 흘러버린 그 세월들이/ 이 애비 가슴속엔 남아있구나’(최백호 ‘애비’ 중). 딸을 시집보내는 애비의 마음이 절절하다. ‘그래 그래 그래/ 울지 마라/ 고운 드레스에 얼룩이 질라’.


 




최백호가 노래한 ‘옛날식 다방’은 이제 어릴 적 이발소 벽에 걸려 있던 밀레의 ‘이삭줍기’ 그림처럼 중년의 가슴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다. ‘새빨간 립스틱에/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이 건네주던 도라지 위스키는 이제 제복 입은 알바생들이 주는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뜨아’(뜨거운 아메리카노)로 바뀌었다. 노랫말처럼 ‘실없이 던지는 농담’이라도 던졌다간 바로 신고당할 수도 있다.


나는 오늘 그를 만나러 간다. ‘최백호의 어텀 브리즈’가 우리 동네(세종문화회관)에서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하는 노래의 힘은 무얼까. 20년 전쯤 직접 물었을 때 내게 이런 대답을 했다. “그냥 살면서 겪은 이야기를 그림 그리듯이 담담하게 풀어헤친 게 공감대를 만드는 것 같습니다.” 노래의 생명력을 제대로 짚었다.

아주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노래채집가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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