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통 콜라’와 ‘캔 콜라’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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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통 콜라’와 ‘캔 콜라’

2019.10.18

지난 추석 즈음에 오랫동안 못 만났던 친척 여동생 둘과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그 둘은 50세 전후의 자매인데, 어릴 때 피자를 유독 좋아했던 기억이 떠올라 서울 인사동에 있는 파스타 집으로 약속 장소를 정했습니다. 식사도 그렇지만 커피 마시며 잡담하기 좋은 곳이라고 생각해서입니다.
앳된 여자 종업원이 주문을 받았습니다. 피자와 파스타를 섞어 주문했습니다. 음식 주문이 끝나자 그 종업원이 물었습니다.
“음료는 뭐로 하시겠어요?”
내가 “콜라”라고 대답하자, 종업원은 “콜라 세 컵요?”라고 물었습니다.
“깡통 콜라로 주세요.” 톡 쏘는 탄산 맛이 강한 깡통 콜라가 생각났습니다. 그러자 종업원은 “예?”라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2, 3초간 종업원과 고객인 나 사이에는 소통의 단절이 있었습니다. 종업원은 내 말을 못 알아들었고, 나는 종업원이 왜 내 말을 못 알아듣는지를 몰랐던 것입니다.
내가 “컵이 아니고 깡통 속에 든 콜라”라고 손짓까지 하며 말하자 종업원은 그때야 알았다는 듯이 “아~캔 콜라요? 예, 알겠습니다.”라고 말하며 물러났습니다.
자매가 까르르 웃었습니다. “오빠는 외국에서도 살아봤으면서 깡통 콜라가 뭐예요. 그런데 놀랍다. 깡통 콜라를 못 알아듣다니.”
그날 우리는 깡통 콜라를 모르는 21세기에 출생한 사람들의 언어생활을 얘깃거리 삼아 수다를 떨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은근한 충격이 남았습니다. 나의 “깡통 콜라”와 젊은 종업원의 “캔 콜라” 사이에 놓인 언어 장벽이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마트폰과 SNS의 융합으로 영어가 국어에 침투하는 속도와 범위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은 짐작했지만, ‘깡통'이라는 말 대신에 ’캔‘(can)이라는 영어가 자리 잡았다는 것은 새삼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캔‘은 편의점이나 호프집에서 흔하게 듣는 말이지만, 나는 그 말이 이미 외래어로 편입된 줄도 몰랐습니다. 깡통이란 말은 음료나 통조림을 담는 양철 또는 알루미늄 통이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머리가 비었다”는 비속어로 더 편하게 쓰고 있으니 본래의 뜻은 이미 소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글날을 앞둔 10월 4일 한글학회 강당에서 열린 ‘이야기 마당’(세미나)에 참석해서 발표와 토론을 들었습니다. 자유칼럼 필진의 한 사람인 임종건 전 서울경제 사장이 “한번 들어보자”고 내 소매를 끌어당겼습니다. 그 세미나에는 고영회 전 대한변리사회 회장(자유칼럼 필자)이 토론자로 나왔습니다. 그날 이야기 마당의 주제는 ‘영어 남용과 혼용, 그대로 두고 볼 것인가!’였습니다. 발표와 토론을 들으면서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우리 언어생활에 영어의 혼용과 남용이 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인터넷 사이트와 광고에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게 많았습니다.

그날 토론에서 나의 이목을 끌었던 두 가지 사례를 소개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대표적 인터넷 포털은 'Google' 'Naver' 'daum'입니다. 이들 포털 이름은 홈페이지에서 언제나 이렇게 영어로 표기되는데, 발표자는 “한글날 딱 하루 ‘구글’ ‘네이버’ ‘다음’이란 한글 표기가 들어간다.”며 한탄했습니다. 나는 그 발표를 기억했다가 9일 한글날 이들 3개 포털 홈페이지를 유심히 살펴보았더니 정말 그랬습니다. ‘Naver' 대신 ‘네이버’로,  ‘daum' 대신 ‘다음’으로 한글 표기가 나왔고, Google은 '구글Google'이라고 한글과 영문자를 병기했습니다. 10일 아침에 보니 한글 표기는 말끔히 사라졌습니다.

두 번째 사례는 외교부의 ‘해외안전여행 어플’ 홍보 문구였습니다.
알Go
챙기Go
떠나Go
이 문구를 보며 외교부 당국자들도 좋아했을 것 같고,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상금이라도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즘 언어 사용의 세태로 보자면 아주 재치 있는 ‘국어와 영어의 융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홍보 문구는 버스에도 붙어 있다고 합니다.
영어를 중시하는 외교부이긴 하지만 정부의 공식 사이트를 이렇게 언어유희로 장식해야 하는지 헷갈렸습니다. 영어 혼용과 남용을 한탄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국어의 ‘동사 어미’를 발음이 같은 영어 단어로 대치한다는 것

외교부의 안전해외여행어플 홈페이지

은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날 나는 한글회관 안에 처음 들어가 보았는데, 이야기 마당이 열린 지하 강당은 누추했습니다. 벽의 페인트가 보기 싫게 벗겨져 있는 등 시설이 낡고 초라했습니다. 세계 11대 경제력을 자랑하는 나라, 연간 정부 예산이 500조 원을 넘어서는 나라에서, 한글학회가 자리 잡은 한글회관이 이렇게 초라한 것이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글이 우수하다고 자랑하는 정치인과 관료 등 힘 있는 지도층 사람들이 국어에 아무 관심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한글학회는 1908년 ‘국어연구학회’라는 이름으로 창립되었고, 1931년 일제치하 때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고쳤으며,  정부 수립 이후인 1949년 ‘한글학회’로 등록되었습니다. 한민족의 얼을 110년 동안 간직해온 대표적 학회입니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글학회가 급속한 세계화와 기술발전으로 변화하는 언어 환경에 맞춰 국어를 연구하고 다듬는 21세기 '집현전'이 되도록 누군가 힘 있는 사람들이 나서면 좋겠다는 생각 말입니다. 권력 싸움에 하루도 쉬는 날이 없는 정치인들, 그러면서도 어마어마한 나라의 녹을 받아먹는 국회의원들이 이런 일에 나설 수 없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곳에서 영어 혼용과 남용에 대한 체계적 조사와 연구 및 홍보를 하고, 또 합리적 대안을 마련하여 정리한다면 국어를 보다 아름답고 풍부하게 발전시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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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수종

‘뉴스1’고문과 ‘내일신문’ 칼럼니스트로 기고하고 있다. 한국일보에서 32년간 기자생활을 했으며 주필을 역임했다. ‘0.6도’ 등 4권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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