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겹살 이야기. [한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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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겹살 이야기.

2019.10.17

가을바람이 소슬하게 부는 저녁나절이면 삼겹살에 차가운 소주 한잔이 절실하게 떠오릅니다. 삼겹살 구이를 떠올리면 고기를 굽는 연기가 구름처럼 떠 있는 실내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연상이 됩니다. 그 밑에서 몇 잔 술에 벌겋게 취기가 오른 얼굴로 목젖이 보이도록 웃어재끼며 술잔을 주고받다 보면 시간이 토끼처럼 뛰어갑니다.

파초처럼 혈기가 푸르던 젊은 시절에 대작(大作)을 쓰겠다는 오만(傲慢)에 젖어서 강원도 장성이라는 탄광 지역에서 1년여 동안 머문 적이 있었습니다.

장성은 대한석탄공사가 있는 곳으로 크고 작은 탄광들이 산재해 있었습니다. 대한석탄공사는 장성이나 황지 지역에 있는 사설 탄광을 모두 합친 것보다 규모가 컸습니다. 사설 탄광은 무슨무슨 광업소라고 회사 이름을 붙여 말하지만, 대한석탄공사는 그냥 ‘광업소’라고 불렀습니다. ‘광업소’가 장성 경제의 핵을 이룰 정도이다 보니 광업소 유니폼만 입고 있으면 어디서든지 쌀부터 시작해서 생필품, 하다못해 약까지 외상으로 살 수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광업소 월급날은 계절을 가리지 않고 장성 읍내가 무슨 축제날처럼 떠들썩합니다. 개들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흥청거렸습니다. 식당은 물론이고 태백관이나 영월관, 중앙관 같은 제법 규모가 큰 요리집도 통금 전까지 광부들이 상다리를 두들기며 부르는 노래 소리가 골목에서 춤을 춥니다.

한 달간 깊은 땅속에서 칠성판을 등에 지고 곡괭이로 탄을 캐서 번 돈으로 축제를 벌였던 월급날이 지난 무싯날의 장성은 깊은 고요속에 잠겨 듭니다. 그래도 술과 고기를 파는 식당은 예욉니다. 광부들은 목이며 식도에 묻어 있는 탄가루를 씻어내겠다는 명분을 앞세워 얇은 돌 위에 삼겹살을 구워 먹습니다. 삼겹살을 구워 먹는 얇은 돌은 탄광에서 흘러나온 것들입니다. 탄가루를 씻어내겠다고 먹는 삼겹살을 석탄성분이 있는 돌에 구워 먹는 셈입니다.

70년대에는 슬레이트 조각에 삼겹살을 구워먹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친구들하고 강가에 놀러 갈 때는 슬레이트 조각부터 챙깁니다. 슬레이트 조각을 챙기지 못했어도 강가에 가면 누군가 고기를 구워먹고 버린 슬레이트 조각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걸 강물에 대충 씻어서 돌화덕을 만들어 올려놓고 불을 지핍니다.

슬레이트의 주성분이 석면이라는 것은 슬레이트를 제조하는 공장 사람들 밖에 모르던 시절이었으니 기름기가 빠져 바삭하게 익은 삼겹살은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것 같습니다. 슬레이트 조각이 크다 보니 한쪽은 시커멓게 타고 있기도 합니다. 시커멓게 탄 고기가 바삭거리며 더 맛있다고 골라 먹는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삼겹살을 모르던 1960년대 즈음에는 앞다리나 뱃살 부분을 듬성듬성 썰어서 석쇠에 올려놓고 숯불에 구워 먹었습니다. 산골의 작은 면소재지였지만 인근에 있는 무주며, 금산, 영동에서도 장사꾼들이 몰려 올 정도로 장이 큰 동네라 정육점이 세 곳이나 있었습니다.

어른들은 정육점 주인을 부를 때 칼잡이의 사투리인 ‘칼잽이’라 부르며 화투판의 흑싸리 껍데기쯤으로 여기는 눈치였습니다.

장날 파장 무렵이면 손님이 넘치는 곳이 정육점들이었습니다. 칼잽이들은 맨손에는 시뻘건 돼지피를 묻히고 연신 고기를 썰어서 저울에 답니다. 신문지에 뚤뚤 말아서 손님에게 내밀고 시뻘건 손으로 돈을 받습니다. 돈을 받을 때는 돈에 돼지피가 지폐에 묻지 않도록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서 받았습니다.

장터 초입에서 장사를 하는 ‘칼잽이’ 의 의상이 높아지기 시작한 것은 텔레비전이 보급되기 시작할 무렵입니다. 동네에는 두 집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텔레비전을 구입했습니다. 장터 초입에 있는 정육점과 아들이 상고를 졸업하고 농협조합에 갓 취직을 한 집이었습니다.
조합서기 집은 대문을 걸어 잠그고 자기네 가족만 텔레비전을 봤지만, 장터에 있는 정육점은 텔레비전 방영이 끝날 때까지 안방 문을 열어 두었습니다. 일찌감치 저녁을 먹은 사람들은 안방을 차지하고, 좀 늦은 사람은 마루, 들에서 늦게 들어 온 남편 밥을 차려 주고 잰걸음으로 달려 온 아낙네들은 장터에서 목을 빼고 시청을 했습니다.
소금 먹은 사람이 물 찾는다고 공짜로 텔레비전을 늦게까지 봤으니, 고기라도 팔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장사가 더 잘됐습니다. 슬레이트집을 헐어 버리고 현대식으로 번듯하게 새로 지었습니다. 식당홀도 더 크게 지었고, 문은 유리로 만들었습니다. 유리문에는 빨간색으로 큼지막하게 정육점 이름을 선팅 해 놓았는데 제가 볼 때는 굉장히 멋있어 보였습니다.  정육점 주인을 부를 때 칼잽이라는 호칭도 천 씨로 바뀌는가 했더니 천 사장으로 굳어졌습니다.

해가 질 무렵 정육점 앞을 지나가다 보면 숯불구이를 하는 고소한 냄새가 흘러나옵니다. 요즈음 같았으면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서 저녁에 삼겹살이나 구워먹자고 했을 겁니다. 그 시절에는 귀한 손님이 왔을 때 닭을 잡아 대접하는 것이 풍습이었습니다. 돼지고기는 명절 때 제사상에나 오르는 음식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하기는 했지만 군침을 삼키기는 않았습니다.

명절 전날이면 칼잽이가 소를 잡는 날입니다. 칼잽이와 가깝게 지내는 몇몇은 소 잡는 날이면 도살장으로 구경을 갑니다. 칼잽이는 소를 도살해서 구경꾼들에게 천엽과 쇠간을 내놓습니다. 구경꾼들은 대접에 받는 소주를 숭늉 마시듯 들이켜고 쇠간을 우적우적 씹어 먹습니다. 킬킬 웃으며 손으로 큼직한 쇠간 조각을 들어 입술에 피를 묻히며 먹는 어른들의 모습이 얼핏 무섭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명절이 지나면 정육점 옆의 장터에 쇠가죽을 말리는 광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추석이 이를 때는 쇠파리가 떼로 몰려와서 윙윙 거리고, 아이들은 신기하다는 얼굴로 쇠가죽을 구경했습니다.

명절 때마다 쇠가죽을 말리던 정육점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정육점만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장날이면 장터가 터져 나갈 만큼 모이던 5일장도 사라졌습니다. 채소장수 두세 명이 오전에만 배추며 상추에 무나 깻잎 같은 걸 박스 째 늘어놓고 장사를 합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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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한만수

1990년부터 전업으로 소설을 쓰고 있음. 고려대학교 문학석사. 실천문학 장편소설 “하루” 등단. 대하장편소설 “금강” 전 15권 외 150여권 출간. 시집 “백수블루스”외 5권 출간. 이무영문학상 수상. 장편소설 “활” 문화예술진흥위원회 우수도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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