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면서도 즐거운 여름 나기 [정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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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면서도 즐거운 여름 나기

2019.08.20

꼭 올해만은 아니지만 태풍이 잦고 비가 많은 여름이다. 제주에는 짙은 안개가 끼는 날도 많다. 더위로 치면 작년에 엄청난 폭염을 겪은 탓도 있어 이번 더위는 그래도 낫다는 생각이다. 육지 본토에 폭염이 맹위를 떨칠 때 여기엔 태풍이나 비, 또는 잦은 안개가 시원함을 가져다줘서 고맙기도 하지만 며칠이나 계속되는 비와 안개는 결코 반갑지 않다. 지독한 습기에 더해 사방이 희뿌연 탓으로 막막함과 고립감마저 들기 때문이다.  

비나 안개가 많으면 수목이 더 무성해지고 잡초도 더욱 기승을 부린다. 전지(剪枝), 잔디 깎기, 잡초 제거에, 가만두면 꽃나무들을 질식시킬 넝쿨의 제거 등 할 일이 태산이다. 요즘은 비가 없는 날이면 마당에서 반나절 또는 한나절 비지땀을 흘리며 보내는데 옅은 안개가 끼면 더위가 덜해서 좋은 점도 있다. 수목 돌보는 일이 많다 보니 가지치기도 실력이 늘어 이젠 초보 정원사라 해도 되지 싶다. 가지를 잘 치고 관목을 예쁘게 다듬어 놓으면 스스로도 멋지다는 생각이 들고 오가는 이들에게서도 칭찬을 받는다.

꽃나무 가꾸는 일은 아내가 나보다 한 수 위다. 아내는 삽목(꺾꽂이)을 즐겨 하는데 올해 삽목한 것이 이런저런 꽃나무 해서 2백 개 이상은 되는 것 같다. 세이지(Sage)류, 황금조팝나무, 산수국 등 작은 꽃나무들을 빈자리에 많이 심으면 잡초가 나고 번지는 것를 그만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싹둑 잘라내어 땅에 꽂아둔 연약한 줄기에서 뿌리가 나고 새잎이 돋는 것을 보는 일 자체가 즐겁다. 마치 태아와도 같은 어린 생명들이 가을이면 제법 성장해 있을 것이란 흐뭇한 기대감에 젖기도 한다.

정원 일을 하는 것은 고되기도 하지만 즐거움도 있게 마련이라 일을 하다가 문득문득 코끝에 와 닿는 꽃향기들이 반갑기만 하다. 강하지도 은은하지도 않은 치자향에 정신이 아찔하고, 곳곳에 퍼져 있는 백리향(Thyme)과 로즈마리의 아득한 향기에 취하다가 강한 박하 향기에 퍼뜩 정신이 들기도 한다. 이런 근사한 꽃향기에서 매혹적인 여인네들의 향수가 나올 것이다. 치자는 희디흰 꽃 색깔이 또한 백미다. 치자 종류 중 바위틈에서 옆으로 낮게 뻗어가며 꽃 피우는 작은 치자가 더욱 사랑스럽다.

여름 나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또 있다. 올해는 매실이 제법 많이 열렸는데 십 수 년이 되는 제법 큰 나무들에 매실이 그득 매달렸다. 따기도 쉽지 않지만 따 놓아도 처리하기가 귀찮아서 놀러 온 친척들이 다 따가도록 했다. 정작 우리에게 남은 게 없어 좀 서운한 생각이 들다가 며칠 뒤 아래 마당에 있는 높은 매화 고목들을 쳐다보니 크고 누런 매실이 꽤 많이 달려 있었다. 긴 대나무 장대로 털어서 열매를 따는 재미가 좋아 두어 시간 몰입할 만했다. 다 따고 보니 몇 상자는 될 듯했는데 잘생긴 데다 불그레하기까지 한 놈들도 많아 여간 만족스러운 게 아니었다. 우리는 농익은 매실로 매실주를 담근다는 생각에 행복감에 빠졌다.

오래전 처가에서 처음 매실주를 맛보고 나서 지금껏 매실주를 가까이 두고 산다. 시중에서 파는 달콤한 매실주가 아니라 집에서 정성껏 빚은 고은 술이다. 젊은 시절 어느 집 약혼식에 가서 잔에 따라 놓은 맑은 술을 마시고 ‘아, 이 매실주는 참 부드럽구나’ 하고 칭찬을 했더니 주위에서 놀리듯 웃는 것이었다. "이건 매실주가 아니고 백포두주요" 하면서...  포도주가 귀하던 그 당시 언뜻 촌놈이 된 기분이었지만 어설픈 백포도주에 비하면 매실주 예찬은 지금도 덜하지 않다.

겨울 한파를 이기며 꼿꼿이 피어나는 매화의 향기는 아무리 찬탄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윽할 뿐 아니라 여운이 오래 남는다. 매실은 매화꽃과 달리 향이 깊고 짙어 오래 맡으면 취할 정도다. 보통은 덜 익은 풋풋한 열매로 매실주를 담그는데 이처럼 잘 익은 황매실로 담그는 매실주는 그 맛이 어떠할까. 설탕을 넣지 않고 35도짜리 소주와 매실로만 담그는데 백일 후에 매실을 다 꺼내고 남는 술만 보관하되 5년 정도 숙성이 돼야 제 맛이 난다고 한다. 하지만 그리 오래 기다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매화나무를 생각하면, 우선 보기 좋은 꽃 모양새에다 그윽한 향기에다, 나아가 탐스러운 열매까지 맺어주니 이런 훌륭한 나무가 또 어디에 있을까 싶다. 매화 얘기를 하니 문득 겨울이 스쳐간다. 무더위를 못 참을 때 잘 익은 매실주에 얼음을 넣어 마시면서 한겨울 찬 눈발을 견뎌내는 매화를 생각하면 더위를 좀 식힐 수도 있을 것이다. 장마와 폭염과 안개 속에서 꽃나무 가꾸는 고된 일을 하면서도 이런 즐거움이 있어 가는 세월이 밉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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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정달호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줄곧 외교관으로 일했으며 주 파나마, 이집트대사를 역임했다. 은퇴 후 제주에 일자리를 얻는 바람에 절로 귀촌을 하게 되었고, 현재 제주평화연구원 객원연구위원으로 있으면서 한라산 자락에 텃밭과 꽃나무들을 가꾸며 자연의 품에서 생활의 즐거움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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