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집행에 흑보기는 금물이다 [김홍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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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집행에 흑보기는 금물이다

2019.08.09

윤석열 검찰총장이 취임한 지 보름이 지났습니다. “우리 윤 총장님”은 지난달 25일 취임 첫마디로 “헌법 정신을 가슴에 새기고, 국민의 마음을 경청하며, 국민의 사정을 살피고, 국민의 생각에 공감하는 ‘국민과 함께하는 검찰’을 제안한다”고 천명(闡明)했습니다.
그런데 24번이나 되뇐 국민이라는 언급은 귓전을 스쳐갔는지 기억에 남아 있지 않고, 국회 청문회 전부터 언론 보도로 불거졌던 병역면제 사유인 ‘짝눈’ ‘부동시(不同視)’라는 말만 머릿속을 맴돕니다. 푹푹 삶아대는 무더위 때문일까요.

생소한 말의 뜻을 새기려고 사전과 컴퓨터를 뒤적여 보았습니다. 짝눈은 (1)두 눈의 크기나 모양이 서로 다르게 생긴 눈, (2)양쪽 눈의 시력 차이가 심한 눈, 즉 부동시를 일컫습니다. 아마도 윤 총장은 양 눈의 시력 차이가 큰 부동시인 것 같습니다.
부동시의 의학적 증상은 논할 바 아니고, 특히 눈에 번쩍 띄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한쪽 눈으로 바라본 사물의 현상만 선호하고 반대쪽 눈으로 본 현상은 억제하려는 경향이 지속되면, 반대쪽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능력을 상실할 수 있다”라고.(머니S 7월 8일자)

최근 난마처럼 얽히고설킨 나라 안팎의 위기상황에 밀려 검찰총장은 존재조차 가려졌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평화(경제)'라는 애드벌룬을 띄운 바로 다음 날(6일) 북한은 "맞을 짓 하지 말라"며 또 미사일을 쏘았습니다. 김조원 청와대 민정수석은 취임 열흘 만에 "국민정서와 배치되는 언동을 감찰하겠다"고 발표해 공직사회가 황당해하고 있습니다. 그사이 검찰에서는 윤 총장과 코드가 맞지 않은 검사 69명이 물러나고, 적폐수사 팀과 총장 사법고시 동기들이 요직을 꿰찼습니다. 
이런 판국에 다리 부러진 장수 성 안에서 호령만 하듯, ‘청문회 거짓말’ 상처를 안고 있는 윤 총장이 과연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검찰 개혁을 이룰지 우려가 앞섭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합니다. 맑은 눈은 천진난만하고 사랑이 충만해 있으며, 사심이 없고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세상에는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온전한 두 눈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많습니다. 갈고리눈·뱁새눈처럼 날카롭게 보이지만 까막눈인 사람, 보기에는 멀쩡하나 앞을 못 보는 당달봉사, 눈을 모로 뜨거나 곁눈질로 보는 사팔뜨기, 눈동자가 한쪽으로만 치우쳐 늘 흘겨보는 듯한 흑보기처럼. 

반면 사고로 한쪽 눈을 잃은 외눈박이이면서도 남다른 지위에 오르거나 명성과 업적을 남긴 사람도 많습니다. 통일신라 말 애꾸눈 궁예는 후고구려 왕으로 등극했습니다. 일본 전국시대 천연두로 오른쪽 눈을 잃은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는 독안룡(獨眼龍) 별명을 가진 센다이(仙臺) 영주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전쟁 영웅 모세 다얀은 전상으로 왼쪽 눈을 안대로 감고도 참모총장·국방장관·국회의원을 역임했습니다. 사시(斜視)인 매천(梅泉) 황현(黃玹)은 불후의 기록 매천야록(梅泉野錄)을 남겼습니다. 의안(義眼)이 더 일목요연하다는 정치인도 있습니다.

눈이 사람 전체를 평가하는 기준은 아닙니다. 이 글도 윤 총장의 눈에 대한 의학적 소견만으로 그의 능력과 철학을 운위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음을 밝혀 둡니다. 다만 두 눈끼리의 시각과 판단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주장에는 꺼림칙한 앙금이 남습니다. 글자가 두 개로 보이는 눈으로는 책을 읽을 수도, 사물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도 없으니까요.
그래서 오히려 윤 총장은 한쪽 눈으로 본 사안이 다른 쪽 눈으로 본 사안을 도외시하지 않고, 균형을 맞춰 사법 개혁을 이룩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역설적 기대를 가져봅니다. 

부모가 대학교수인 그는 1980년 서울대 법대 재학 중 교내 모의재판에서 검사역을 맡아 5·18 과잉 진압 주역으로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게 사형을 구형한 결기를 보였습니다. 사시 합격 9수생인 그는 2013년 국정감사에서 “나는 조직에 충성하지,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고 소신을 밝혔습니다. 2013년 박근혜 수사팀장으로 발탁되었을 때는 (전 정권 피해자이지만) “검사가 수사권 가지고 보복하면 그게 깡패지 검사냐”라고 되받아쳤습니다. 말 그대로 불의에 결연히 맞서고, 특정인에 충성하지 않고, 법으로 보복하지 않겠다는 그의 기상이라면 사법 개혁의 적임자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사법기관이 만인의 믿음을 살 수 있는 최후의 보루라고 믿어 왔습니다. 그러나 피의사실 흘리기로 생사람을 매도하거나 죽음으로 몰아넣은 출욕(黜辱 ; 창피를 주어서 물러나게 함), ‘정황’만으로 유죄판결하는 사례를 숱하게 보아 왔습니다. 
‘보상’과 ‘배상’조차 구별하지 못하는 개·돼지 같은 백성도 ‘이것이 법치로구나!’ 하고 반기는  공평하고 정의로운 법리 프레임, 그것을 정착시키는 것이 바로 사법개혁 아닐까요? 그래야 검찰이 숙명처럼 쓰고 다니는 ‘권력의 주구(走狗)’라는 멍에를 벗을 수 있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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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홍묵

경북고,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동아일보 기자, 대구방송 이사로 24년간 언론계종사.  ㈜청구상무, 서울시 사회복지협의회 사무총장, ㈜화진 전무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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