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경제전쟁 긴급진단] "소재·부품 국산화 기존방식 버려야. 1등 기술로 키우고 대기업 사게 하는 환경 필요"


"소재·부품 국산화 기존방식 버려야. 1등 기술로 키우고 대기업 사게 하는 환경 필요"


     박재근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한양대 교수)은 7일 “일본 수출규제가 결국 일본 소재와 IT기업의 매출액을 떨어뜨리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박 교수는 이날 오후 3시 서울 양재동 엘타워에서 열린 ‘일본의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 수출규제에 대한 과학기술계 대응 방안’ 토론회에서 “일본 수출규제로 국내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생산량이 줄면 일본 IT기업에 반도체 칩과 디스플레이 패널 공급이 차질을 빚으면서 일본 업계에도 결국 피해를 입게 될 것”이라며 이렇게 전망했다.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회장 김명자), 한국공학한림원(회장 권오경), 한국과학기술한림원(원장 한민구) 등 과학기술계 3대 학술협단체 주최로 열린 이날 토론회는 일본 수출 규제에 대응해 국내 소재·부품·장비 기업의 경쟁력 확보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마련됐다. 

 

박재근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이 7일 서울 양재동 엘타워에서 열린 일본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 수출규제에 대한 과학기술계 대응방안 공동 토론회에서 정부와 국내 기업, 학계의 대응 방안을 설명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




박 교수는 "한국이 이번 기회를 이용해 주요 핵심 소재 부품의 국산화 및 해외 공급처 다변화를 추진할 경우 일본 소재 업체의 매출액 급감할 것"이라며 "일본 수출규제가 오히려 일본 기업의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실제로 일본 스미토모 화학의 사례를 소개했다. 


1993년 반도체 에폭시 수지 전 세계 물량의 60%를 공급하던 스미토모화학의 제조공장이 폭발사고로 가동이 중단되자 국내 3개 반도체 기업에는 비상이 걸렸다. 당시 삼성전자와 금성일렉트론·현대전자 등 국내 반도체 기업들은 재고 물량을 확보하고 수입처를 다변화해 위기를 넘겼다.  반면 스미토모화학은 이 사고 이후 공장을 재가동했지만 결국 충격을 회복하지 못하고 대만의 에폭시 회사에 매각하는 운명을 맞았다.


한국은 소재·부품 분야에서 대일 의존도를 떨어뜨릴 결정적 기회가 한 번 더 있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나면서 전 세계 IT 분야 공급망이 크게 흔들렸다. 당시 국내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회사들은 반도체 디스플레이 소재부품 장비 50%를 일본에 의존하고 있어 충격은 컸다. 당시에도 정부는 재고 확보와 구매처 다변화를 추진하는 방법과 함께 국산화를 심각하게 고려했는데 대지진 사태가 진정되자 다시 없던 일이 됐다. 오히려 일본 닛산과 혼다 같은 기업들이 한국과 동남아로 공급망을 다변화하고 공장을 일본 내 여러 지역에 분산하며 다시 르네상스를 맞았다는 것이다. 


일본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 수출규제에 대한 과학기술계 대응방안 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제공



반면 한국은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반도체 장비와 소재 분야의 국산화율이 오히려 줄어들거나 정체를 겪고 있다. 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에 따르면 장비 국산화율은 2013년 21%에서 2017년 18%로 떨어졌다. 소재 국산화율도 2011년부터 48%로 정체해 있다. 메모리와 비메모리 반도체 선도국인 한국은 반도체 설비 시장 1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반도체 설비 산업은 12위에 머물고 있다. 정부의 반도체 연구개발(R&D) 사업도 줄고 있다. 2009년 반도체 R&D 신규과제는 3만5500건에 이르렀지만 2017년 1만8538건으로 줄었다. 중간에 약간 늘거나 줄어드는 해가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줄어드는 추세다. 


반도체 석·박사급 연구자 감소도 심각한 문제로 지적된다. 2006년 97명이던 서울대 출신 반도체 인력은 2016년 23명으로 4분의 1로 급감했다. 소재·부품과 장비 분야에서 10년 차 이상 박사급 인력을 보유한 기업은 각각 8%와 32%에 머문다. 박 교수는 “국내기업의 기업부설연구소 소재부품 분야 연구 인력 수급은 매우 어렵다”며 “그나마 정부 국책인력양성사업을 통해 양성된 인력도 대부분 대기업과 중견기업으로 빠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기업들은 이번 사태가 아니더라도 5세대(5G) 이동통신을 기반으로 자율주행차와 사물인터넷(IoT) 등 새로운 서비스가 등장하는 시대가 되면서 반도체 기초체력을 닦는 연구개발(R&D) 투자가 늘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실제 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가 지난해 3월 국내 66개 소재 부품 업체를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70%가 인공지능(AI)과 사물인터넷(IoT), 자율주행차에서 필요한 고속 초저전력 소자 개발을 위해 소재·부품·장비의 R&D예산이 늘어야 한다고 답했다. 그다음으로 17%는 반도체 미세화 한계를 극복할 신재료 발굴과 이를 뒷받침할 공정 소재부품 연구를 위해 R&D 증액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기업들은 당시 조사에서 글로벌 수준의 소재 장비 업체 육성을 위해 정부의 의지 천명과 연구비 배정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반도체 소재 기업의 육성을 위해서는 국산화율과 연구비 배정액을 해마다 제시해야 한다고 답했다.


박 교수는 “정부가 예산과 세제 혜택, 금융, 규제 완화 및 제도개선, 법제화 등으로 다양한 지원책을 마련하고 있지만 단순히 국산화라는 측면에서 접근하면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국내 중소중견기업이 만든 소재와 부품, 장비를 대기업들이 사용할 환경조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반도체 디스플레이 분야는 최고 수준이 되지 않으면 수율 저하로 이어질 수 있는 특성이 있다"면서 "현재 국산 제품은 이류라는 인식하고 있어 아무리 국산화를 한다고 하더라도 쓰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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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교수는 “전 세계적인 보호무역주의에 맞설 전략적인 정책이 필요하다"며 "소재·부품·장비의 공급처 다변화 추진하면서 한국 기업을 공급처 중 하나로 선정하고 이를 정부가 글로벌 최고 수준이 되도록 장기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글로벌 수준으로 육성된 품목에 대해서는 대기업에서 해당 품목의 일정량 이상을 구입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부품소재 전문기업 육성에 관한 특별 조치법을 마련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국내 소재·부품·장비 기업의 글로벌화를 구체화할 방법으로 한국형 테스트베드 구축 방안도 제시됐다. 글로벌 경쟁력을 가르는 기준인 12인치 웨이퍼를 생산하는데 필요한 소재부품 장비를 평가할 성능평가 시설을 만들자는 내용이다. 현재 국내 장비 업체 중 5.8%에 불과한 오직 4곳만이 12인치 웨이퍼 기반 장비를 자체 평가할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소재·부품 업체는 12인치 패턴 웨이퍼 관련 기술 평가를 아예 하지 못하고 있다.


박 교수는 “반도체 소재부품 장비를 국산화하려면 실제 공정과 똑같은 환경에서 평가하는 시설이 필요하다”며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같은 반도체 기업들의 기부와 인력지원을 받아 1000억 원의 예산을 투여해 클린룸과 웨이버 전후 공정장비를 보유한 한국형 테스트 베드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박근태 기자 kunta@donga.com 

고재원 기자 jawon1212@donga.com 동아사이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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