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사노바의 귀향』 [정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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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한 편-『카사노바의 귀향』

2019.06.03

“흰색 잠옷을 입은 마르콜리나는 침대 발치에 서서, 카사노바를 형언키 어려운 공포의 눈길로 살펴보았다. 카사노바도 양손으로 침대를 짚고 몸을 반쯤 일으켜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가 그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하듯이, 그도 그녀에게서 눈길을 뗄 수 없었다. 그의 눈길에는 분노와 수치심이, 그녀의 눈길에는 수치심과 경악이 어려 있었다. 카사노바는 그녀가 자기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알았다. 그 역시 동시에 공기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었고, 어제 탑의 방에 걸린 거울 속에서 본 것 같은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깊이 팬 주름, 얇은 입술, 쏘아보는 눈, 누렇게 뜬 음흉한 얼굴이었다. 그 얼굴은 더욱이 간밤의 격렬한 정사와 아침에 꾼 허겁지겁 쫓기는 꿈, 그리고 깨어났을 때의 끔찍한 깨달음으로 인해서 세 배는 더 엉망이 되었다. 그리고 그가 마르콜리나의 눈길에서 읽어낸 것은 도둑놈-난봉꾼-악당이 아니었다. 그거라면 차라리 나았다. 그는 오로지 하나만 읽어냈다. 그것은 그를 온갖 다른 모욕적인 욕지거리보다 굴욕적으로 깔아뭉갤 법한 것이었다. 그는 늙은이라는 말을 읽었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최종적으로 판단해주는 무엇보다 끔찍한 말이었다. 그녀에게는 그의 알몸을 보는 것이 역겨운 짐승을 보는 것보다 끔찍할 게 틀림없었다.”

오스트리아 작가 아르투어 슈니츨러(1862~1931)가 1918년에 내놓은 『카사노바의 귀향』에서 내가 클라이맥스라고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카사노바는 실제로는 마흔여덟 살에 고향인 베네치아로 돌아갔지만 슈니츨러는 이 소설을 시작했을 때의 자기 나이인 쉰셋에 귀향한 것으로 하고, 실제의 카사노바는 절대 만나지 않은 새로운 인물들과 사건을 만들어 이야기를 풀어나갔습니다. 슈니츨러가 카사노바의 나이를 쉰셋으로 정한 건 40대의 나이에서는 늙음의 서글픔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겁니다. 요즘 같으면 쉰이나 예순 초반도 늙음을 깨닫기엔 부족한 나이이지만 말입니다. 

내가 위에 슈니츨러의 글을 그대로 옮겨 놓은 부분을 왜 이 소설의 클라이맥스라고 생각하는지는 설명 드리기가 어렵군요. 아래에 써 둔 것처럼 카사노바가 마르콜리나라는 스무 살도 채 안 된 아가씨의 방에 왜 들어가려 했으며, 어떻게 들어갔는가를 말씀 드리는 게 그 대답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이건 슈니츨러의 원문이 매우 길어 제가 나름 줄인 겁니다. 어색한 부분이 있을 겁니다만 용서해주시겠지요. ㅎㅎ

<마음도 정신도 몸도 예전 같지 않음을 느끼게 된 지 오래인 쉰세 살의 카사노바는 하루라도 빨리 고향 베네치아로 돌아가려 한다. 유럽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외교관과 군인으로서 풍부한 책략을 보여줬고, 풍부하고 날카로운

아르투어 슈니츨러

지식과 언술로 당대 유럽 지식인들과 수준 높은 논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이런 면모보다는 여자들과 관련된 경험에 더 관심을 보이는 게 싫었다.

자신과 밤을 보냈던 귀부인들을 포함한 경제적 후원자들도 오래전에 떨어져 나가, 옷감과 그 옷감을 꿰맨 솜씨는 여전히 고급품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으나, 해지고 닳은 곳이 많아 밝은 곳에서는 도저히 입을 수 없는 남루한 옷가지 몇 벌을 들고 싸구려 하숙집을 전전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 때문에 간혹 ‘카사노바’라는 이름에 홀려 늙은 자신에게 부딪혀 오는 여인들도 귀찮기만 할 뿐이었다.

신의 존재를 무시하는, 자유주의자로서의 행보를 보인 탓에 베네치아에서 추방된 그는 오로지 고향에 돌아가기 위해 베네치아의 최고 권력기구인 대평의회에 이제는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며 조용히 살고 싶다며 자신을 다시 받아줄 것을 적은 탄원서를 보내놓고 그 답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던 그의 눈앞에 한 여자가 나타나 영원히 꺼진 걸로 알았던 그의 정복욕을 자극한다. 예전에 카사노바의 경제적 도움을 받아 제법 부자가 된 사람의 조카 마르콜리나다. 이 젊은 아가씨는 미모도 미모지만 고등수학이야말로 모든 학문 중에서 가장 환상적이며, 가장 신적(神(的)이라고 말할 정도로 지식이 높고 젊을 때의 카사노바처럼 자유주의적인 주관도 뚜렷하다.

카사노바는 그녀를 처음 소개받았을 때부터 그녀의 이런 면모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녀는 ‘카사노바’라는 이름을 듣고도 그 어떤 상관없는 이름이 거론되었을 때처럼 울림이라곤 전혀 없는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요청에 의해 카사노바가 젊은 날의 화려한 이야기를 과장과 생략을 적절히 섞어가며 펼쳐 놓아도 마르콜리나는 그저 재미있는 책에 나오는 유쾌한 이야기를 듣는다는 표정이었다.

마르콜리나의 젊음과 학식과 어떤 도도함에 자극을 받은 카사노바는 그녀의 침실에 들어가려 하지만 방법을 못 찾는다. 하지만 아주 약간의 행운이, 몇 십 년 전 젊었을 때, 이런 상황에서 저절로 생겨났던 책략과 속임수를 일깨워준다. 카사노바는 마르콜리나의 숨은 애인이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된 걸 알고는 현란한 언변으로 그를 곤경에서 빼주겠다며 설득하고 협박한 끝에 비밀 열쇠를 얻는다. 깜깜한 밤에 그녀의 방에 잠입한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를 취하고 그녀가 눈치채기 전에 빠져나와야 하는 걸 깜빡 잊고 잠들었다가 희미한 새벽에 미리 깬 그녀와 눈이 마주친다.>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함께 활동했던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여섯 살 아래인 슈니츨러를 ‘심층심리의 탐구자’라고 높이 평가했습니다. 자기는 오랜 세월 많은 사람을 상담하고, 그것을 분석, 연구해 ‘정신분석학’에 이르렀지만, 슈니츨러는 직관적으로, 문학적 상상력만으로 인간의 자의식을 분석해냈다는 거지요. 슈니츨러는 1926년에는 『꿈의 노벨레』도 썼습니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과 제목이 비슷한 이 단편은 이혼하기 전, 한창 젊었던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이 주연한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Eyes wide shut)>의 원작입니다. 1999년 개봉된 이 영화에서 검정색 사제복과 수녀복을 입은 수십 명의 남녀가 가면을 쓰고 춤을 추는 장면, 그 많은 젊은 여자들이 수녀복 속에서 알몸으로 나타나는 장면이 더 기억납니다.

프로이트가 슈니츨러를 어떻게 평가했든 간에 『카사노바의 귀향』을 읽고는 좀 불편했습니다. 이 소설이 카사노바의 욕망 같은 건 아예 없는 사람들에게도 이따금 자신의 늙은 모습을 상상하고 그려보게 하면서, 즉 '공기(空氣)의 거울에 자신을 비춰 보게 하고', "어쩌면 나도 젊은이들에게 끔찍한 존재로 각인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쌍하고 비참한 자각을 하게 할 거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나이 듦은 스스로 알면 모를까, 남에 의해 깨닫게 되면 불쌍하고 비참한 것 아닌가요?

**이 글을 먼저 읽어주신 자유칼럼 임철순 공동대표께서 독일어 사전까지 찾아서 ‘공기의 거울’보다는 ‘세월의 거울’이 소설적으로 더 어울릴 것 같다는 의견을 주셨는데, '세월의 거울'이 ‘공기의 거울’보다 덜 어렵고 덜 공허한 표현인 건 사실이지만, 신새벽에 신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카사노바가 그 황망한 가운데서 세월의 흐름을 반추할 겨를이 있었을까 싶네요. 일순간에 눈앞에 떠오른 자신의 벌거벗은 몸은 '공기의 거울'에 더 잘 비치지 않았을까 합니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에서 베껴 넣은 주제에 번역자의 노고를 무시하고 이 부분만 ‘세월의 거울'이라고 써넣는 것도 심한 결례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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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정숭호

1978년 한국일보 입사, 사회부 경제부 기자와 여러 부서의 부장, 부국장을 지냈다. 코스카저널 논설주간, 뉴시스 논설고문, 신문윤리위원회 전문위원 등 역임. 매주 목요일 이투데이에 '금주의 키워드' 집필 중. 저서: '목사가 미웠다'(2003년), '트루먼, 진실한 대통령 진정한 리더십'(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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