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을 되생각하기 [정진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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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을 되생각하기

2019.06.01

5월은 싱그러운 달입니다. 그래서 그랬겠지만 여러 ‘기리는 날’이 한 달 내내 차 있습니다. 근로자의 날, 어린이날, 어버이날, 유권자의 날, 부처님오신날, 스승의 날,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 발명의 날, 세계인의 날, 성년의 날, 부부의 날, 바다의 날 등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누구에게나 와 닿는 날들은 가정과 관련된 날들입니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부부의 날, 성년의 날들이 그러합니다. 그래서 5월을 아예 ‘가정의 달’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막 5월이 지났습니다. 표현이 좀 거칠지만 ‘가정에 휘몰아친 회오리바람’이 바야흐로 잠잠해질 것 같습니다. 아니면, 좀 부드럽게 ‘이윽고 가정이 고요해질 것 같다’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5월은 ‘가정의 달’다운 ‘소란’이 온 가정에 일었었습니다.

그 소란이 즐거운 잔치의 북적거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소란으로 5월을 보내셨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 소란은 우울한 갈등의 북적거림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 소란은 즐거움과 우울함이 뒤섞인 것이라고 해야 더 정확할는지도 모릅니다. 어찌 됐든 5월은 가정을 요란하게 뒤흔들어 놓은 달이고, 누구나 5월이 가정의 달이라는 사실 때문에 평소에 겪지 않은 긴장을 5월에 겪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 삶에서 긴한 어떤 주제를 택해 그것의 참뜻을 기리려 특정한 날을 ‘그 날’로 정하는 일은 착한 뜻에서 비롯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어린이날도 그러하고 어버이날, 부부의 날도 그러합니다. 그런 날이 정해지면 새삼 그들이 있다는 사실, 그들과의 관계, 이제까지 자기가 지녔던 그들에 대한 관심을 되살피게 됩니다. 그래서 고마움도 정도 새삼스러워지고, 모자라고 못나게 굴던 일에 대한 부끄러움도 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당연히 그런 것을 계기로 삶의 결이 고와지고, 서로 어울림이 더 따듯해지겠죠. 참 좋은 일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 삶이란 소박하기 그지없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저녁에 잠들기까지 세끼 밥을 먹고, 이런저런 사람 만나고, 마음이 편했다 불편했다 해가면서, 갖은 일에 시달리며, 그런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것도 만나고 겪고, 보람을 지으면서 그야말로 희로애락의 여울을 흐릅니다. 그게 삶입니다. 일상인 거죠. 어린이와의 만남도 그런 삶이 지닌 지극히 소박한 일상이고 어버이나 부부의 만남도 그러합니다.

그런데 막상 날이 정해지면 그 주제가 갑자기 튀어 오릅니다. 그래서 어린이를 대하거나 어버이를 뵙거나 부부가 만나는 일이 예사롭지 않게 됩니다. 안 하던 말도 하고, 하지 않던 행동도 해야 합니다. 일상이 작위적이게 되는 거죠. 그렇게 되면 일상이 흔들립니다. 일상이 비일상적이게 된다든지 사건이 된다고 표현하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날의 제정 동기에는 예외적인 사건, 곧 일그러진 어린이, 부부, 자식과 어버이의 예를 일상화하려는, 곧 사건의 일상화 의도도 또한 담겨 있습니다. 왜냐하면 날을 만든 의도는 일상이 티격태격하지 않고 오순도순하게 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상이 일상의 흐름 속에서 저절로 지어내는 것이어야지 일상을 사건화한다든지 사건을 일상화하여 그 사건의 예외적 절대성을 준거로 작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정해진 날은 그렇게 기능합니다. 그러니 아무리 계몽이나 계도라는 친절한 어휘로 다독이며 행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결국 ‘날의 제정’은 힘의 작희라는 판단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렇다보니 세월이 흐르다보면 어느덧 정해진 날이 기리기도 기리지 않기도 어색한 날이 되고 맙니다. ‘스승의 날’이 처한 운명이 그러합니다. 이윽고 어버이날도 부부의 날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른바 국경일이 그저 ‘노는 날’이 되어버린 것도 다르지 않습니다. 게다가 어우러짐을 부추기는 날이 있는가 하면 갈라짐을 이끄는 날도 있습니다. ‘날의 정치’가 커다란 소용돌이를 일으킬지도 모를 일입니다.

물론 ‘날’이 된 주제의 속성에 따라 날에 대한 다른 평가를 할 수 있습니다. 일정한 문화권 안에서, 또는 공동체 안에서, 모두 기억에 담고 반추해야 할 ‘날’이 되어 마땅한 주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공유해야 할 가치를 가르치는 일상의 교육의 현장이나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일정 기간 이를 위해 활동하는 캠페인을 통해서도 충분히 섭렵할 수 있는 주제가 ‘날’로 정해지는 것은 아무래도 ‘힘’의 과잉현상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가정의 달 5월을 지낸 ‘민낯의 경험’이 ‘날의 민주화’를 발언할 만큼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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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정진홍(鄭鎭弘)  

1937년 충남 공주 출생. 서울대 명예교수(종교학).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근저: ‘짧은 느낌, 긴 사색’(당대, 2015), ‘지성적 공간 안에서의 종교’(세창출판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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