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관계법 40년'의 역설 [허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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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관계법 40년'의 역설

2019.04.29

대만관계법(Taiwan Relations Act)이 올해 4월로 시행 40년을 맞았다. 미국 정부가 대만의 안보를 보장하기 위해 1979년 제정한 법으로, 양국간 상호대표부 설치를 통해 상업·문화 교류를 뒷받침하는 것은 물론 대만에 방어 무기를 판매할 수 있는 근거도 규정되어 있다. 대만의 평화와 안정 유지가 미국 이익에 직결된다는 전제에서 마련된 법이다. 대만해협을 사이에 두고 중국의 압력이 갈수록 거세지는 상황에서 대만의 마지막 교두보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미국이 국교가 끊어진 특정 국가에 대해 자신의 국내법으로 안보를 보장한다는 자체가 지극히 예외적이다. 국제법의 일반 상식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당시 국제정세에서 중국과의 수교가 불가피했고 따라서 그 반대편에 서 있는 대만과 단교를 결행해야 했으면서도 완전히 포기할 수 없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지미 카터 대통령 당시이던 1979년 새해 시작과 함께 중국 수교가 발효됐고, 그에 앞서 대만에 대한 단교 방침이 통고되면서 효력을 잃게 된 기존 방위조약의 공백을 대만관계법이 메워주고 있는 셈이다.

이에 대해 중국 정부가 ‘하나의 중국(One China)’ 원칙을 내세워 반발하고 있지만 미국의 입장은 흔들리지 않고 있다. 대만이 중국 영토의 일부이므로 미국의 개입은 명백한 내정간섭이라는 게 중국의 주장이다. 그렇다고 미국이 ‘하나의 중국’ 원칙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1972년 역사적인 중국 방문을 통해 마오쩌둥(毛澤東)과 공동 서명한 ‘상하이 코뮤니케‘에도 핵심 내용으로 포함되어 있다. 중국과 수교를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이 원칙을 받아들여야 했고, 그 뒤 미·중 수교 직전 발표된 베이징 공동성명 등 두 차례의 코뮤니케에서도 거듭 확인된다.

그러나 미국은 1982년 발표된 별도의 ‘6개 보장(Six Assurances)’을 내세워 대만관계법을 뒷받침하고 있다. 대만에 대한 무기판매에 있어 중국 측의 동의를 받지 않을 것이며, 판매 종결 시한도 설정하지 않겠다는 입장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미·중 관계에서 대만을 인식하는 방침이 이렇게 어긋나게 나타나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대만관계법과 ‘6개 보장’이 세 차례의 코뮤니케보다 더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양안관계를 바라보는 미국의 눈길이 그만큼 예민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특히 최근 들어 미국은 중국의 거센 반발을 받으면서까지 대만을 두둔하는 모습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이던 2016년 12월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으로부터 축하 전화를 받고는 ‘대만 총통(President of Taiwan)’이라는 표현을 써가면서 자신의 트위터에 통화 사실을 공개한 것부터가 전례가 없었던 일이다. 차이 총통이 대만 수교국 순방길에 미국 도시를 경유할 경우 미국 측의 의전 절차가 격상된 데다 지난해에는 대만여행법(Taiwan Travel Act)까지 시행됨으로써 한층 긴밀해진 관계를 과시하는 중이다.

현재 미국 정부는 대만에 대한 5억 달러 규모의 무기판매 계획을 진행하고 있으며 태평양함대 소속 구축함을 수시로 대만해협에 파견하는 방법으로 대만 안보 유지를 다짐하고 있다. 미군 해병대가 소규모로나마 다시 대만에 파견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미국 언론의 보도에서도 양국 관계의 현주소를 짐작하게 된다. 지난해 타이베이 주재 미국대표부 청사가 새로 세워지면서 청사 경비 목적으로 거론된 것이지만 상징적인 의미는 그 이상이다.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볼턴 안보보좌관도 대만관계법 40주년을 맞아 대만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 전적으로 대만의 입장을 두둔한다고 단언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단지 중국과의 관계에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자는 취지가 앞세워진다. 대만관계법과 ‘6개 보장’에도 양안 문제에 중재자로 개입할 의사가 없으며, 양안 문제는 중화인들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미국의 입장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 대만의 독립도, 중국에 의한 합병도 아닌 ‘현상 유지’를 원하고 있을 뿐이다. 양안관계에 대한 미국 정부의 전략적 모호성을 말해준다.

대만이 미국의 지원에 안도하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일말의 의구심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그런 때문이다. 미국이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대만에 대한 입장 변화를 나타내면서 1971년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자리에서 쫓겨난 것은 물론 유엔 회원국 자격을 박탈당했을 때의 낭패감도 완전히 잊지는 못했을 것이다. 1978년 12월 미국의 단교 방침이 발표됐을 때의 배신감에 있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대만이 1980년대 후반까지 핵무기 개발 계획을 은밀히 추진했던 것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자위수단 확보 노력의 일환이었다.

문제는 중국이 대만에 대한 합병 의지를 꺾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도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대만을 점령하겠다는 의사를 공공연히 내비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만으로서도 독립이냐 통일이냐를 놓고 스스로 운명의 주사위를 던져야 할 날이 다가오게 될 것이다. 당장 내년으로 다가온 차기 총통 선거에서도 집권당인 민진당과 보수야당인 국민당 사이에 가장 큰 이슈로 떠오르는 문제다. 대만에서 ‘중화민국’이라는 정식 국호롤 아예 ‘대만’으로 바꾸자는 여론이 제기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몰론 지금의 양안관계를 살펴볼 때 미국의 대만 지원은 더욱 강화될 것으로 여겨진다. 미국이 과거 대만과의 관계를 단절하면서까지 중국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 소련의 팽창을 견제하겠다는 것이었지만 오히려 지금은 중국이 미국의 가장 커다란 위협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국제법에서도 전례가 없는 대만관계법의 효율성이 강조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대만관계법이 시행된 지난 40년 세월이 미국과 대만의 단교 역사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게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설적인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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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허영섭

이데일리 논설실장. 전경련 근무. 경향신문과 한국일보에서 논설위원 역임. 미국 인디애나대학 저널리즘스쿨 방문연구원. '일본, 조선총독부를 세우다, '대만, 어디에 있는가', '영원한 도전자 정주영'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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