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냥갑 아파트 탓하며 ‘무늬만 건축 혁명’ 하려나


성냥갑 아파트 탓하며 ‘무늬만 건축 혁명’ 하려나

함인선 건축가·한양대 건축학부 특임교수


서울시 도시·건축 혁신안 도마에

디자인 개입 말고 자율에 맡겨야


   은마아파트에 이어 잠실 주공 5단지 아파트 주민들이 서울시청 광장에 몰려나왔다. 이들은 서울시 요구대로 국제공모를 했음에도 재건축 심의를 지연시키는 ‘행정 갑질’을 규탄했다. 지난달 시가 내놓은 ‘도시·건축 혁신방안’이 우스워졌다. 재건축·재개발 인허가 절차 개선과 아파트 디자인 수준 향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프로세스 혁신은 진작 했어야 할 일이었고, 디자인 개입은 앞으로도 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일반 건축물과 달리 아파트는 법 재량주의가 적용돼 사업 승인권자가 공공성을 위해 여러 요구를 할 수 있다. 이는 고약하기로 소문난 각종 심의에 의해 담보된다. 수많은 분야에서 각기 내는 목소리를 담는 과정에서 큰 비용과 시간이 든다. 뒤늦게나마 싱가포르의 재개발청(URA) 같은 기구를 통해 사전기획 및 전 과정을 공공이 책임지겠다니 기대해 본다. 



  

그러나 디자인은 아니다. 서울시는 “성냥갑 같은 획일적인 아파트를 벗어나 다양한 경관을 창출하겠다”고 했지만 바로 그 전제부터가 얼토당토않다. 성냥갑이 왜 문제이고, 왜 도시는 다채로워야 하는가. 이에 대해 깊은 성찰 없이 나온 상투적인 진단이자 처방이다. 

  

지난해 서울 용산에 준공한 아모레퍼시픽 신사옥은 초대형 성냥갑 건물이다. 그런데도 ‘서울풍경을 바꾼 최고 건물’로 선정됐고 박원순 서울시장도 “세계적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가 지은 아모레퍼시픽 사옥 같은 명소가 곳곳에 들어서야 한다”고 칭찬했다. 요즘 시중에는 외관만 그럴듯할 뿐인 타워형 아파트보다 채광과 맞통풍이 잘 되는 성냥갑 아파트가 더 인기다. 성냥갑(판상형) 아파트의 경쟁률이 훨씬 높고 시세 차이도 크다. 

  

아파트는 20세기 초 도시 인구 폭발에 대응해 탄생한 근대건축의 발명품이다. 아파트를 미니멀한 박스로 지어온 것은 대량생산의 용이성에다 장식 배제와 기능주의의 모더니즘 미학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병영 같은 한강 변 아파트 단지는 서울 주택문제의 해결사이자 근대적 삶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들이 도시경관의 주적으로 취급된다. 시기적으로는 다품종 소량생산의 포스트 포디즘이 시작되는 1980년대부터다. 따분하고 금욕적인 모더니즘을 대체할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 건축미학의 등장과 맞물린다. 한국에서는 분양가 자율화가 이뤄진 1990년대부터 다품종 아파트들이 생겨난다. 강남 타워팰리스를 비롯한 주상복합 아파트들이 대표적이다. 

  

아모레퍼시픽 사옥 같은 건축 경향을 미니멀리즘 또는 네오 모던이라 한다. 레이트 모던, 포스트 모던을 거쳐 백 년 만에 다시 원점으로 회귀했다. 소비자들도 외관과 상징성 대신 실용적이고 거주환경이 좋은 성냥갑 아파트로 복귀하고 있다. 양복 깃이 유행 따라 넓어지고 좁아지듯 건축 역시 그렇다. 관청 소관이 아니라는 얘기다. 



  

다양함 또한 공공에서 호불호를 논할 주제가 아니다. 극단적으로 다채로운 도시인 놀이동산, 키치 건축의 전형인 예식장·모텔을 보면서 예쁘다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미학적 불쾌감을 느낄 수도 있다. 아파트의 진짜 문제는 성냥갑 형태나 다양함 부족이 아니라 담과 녹지에 의해 섬처럼 고립된 데 있다. 19세기 프랑스 파리 대개조 때 시장 오스만은 대로를 내고 연도에 아파트를 세우면서 높이와 건축 양식까지 통일시켜 획일적으로 지었다. 그런데도 파리는 다채롭다. 집이 길과 접해있어 다양한 삶의 행위가 그대로 풍경이 되기 때문이다. 

  

기왕 ‘도시계획 혁명’이라는 거창한 구호를 내걸었으면 단지형 대신 가로형 아파트로 패러다임을 전환하겠다고 선언했으면 어땠을까. 개발 시대의 유령인 아파트 단지의 담조차 극복하지 못하면서 애꿎은 성냥갑 스타일만 탓하는 ‘무늬만 혁명’이 안쓰럽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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