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 덕에… 현금부자들 아파트 주워담는다

규제 덕에… 현금부자들 아파트 주워담는다

     30대 주부 A씨는 지난달 서울 서대문구 '홍제역 해링턴 플레이스' 전용면적 84㎡ 1순위 청약에 당첨됐다. '드디어 지긋지긋한 전세 생활을 청산하게 됐다'는 기쁨도 잠시. A씨 부부는 마음고생만 하다가 결국 계약을 포기했다. 집값 8억8000만원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A씨는 "부모님 집을 담보로 대출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은행에서 '1억원 이상 불가' 통보를 받았다"고 말했다.

16일 인터넷에서는 이 아파트 '무순위분양'이 진행됐다. 일반분양 419가구 중 A씨 같은 이들이 포기한 174가구를 놓고 청약통장 없이 벌이는 경쟁이었는데, 5835명이 몰리면서 경쟁률 33.5대1을 기록했다. 



비슷한 상황은 2월에도 있었다. 서울 동대문구 'e편한세상 청계센트럴포레' 미계약분 90가구 추첨에도 신청자 3000여명이 몰렸다.

지난 11일 서울 동대문구에 있는 청량리역 한양수자인 192 견본주택 앞에 방문객들이 관람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청량리역 한양수자인 192 사전 무순위 청약에는 1만4376명이 몰릴 정도로 관심이 뜨거웠다. /뉴시스

전문가들은 "대출 규제와 새 청약 제도가 빚은 규제의 역설(逆說)"이라고 분석했다. '무주택 실수요자'를 위해 만든 제도지만, 무주택 실수요자가 몰리는 1순위 청약은 미달이 나거나 미계약이 속출하고, 그 미계약분 분양에는 다주택자나 청약가점이 낮은 자산가까지 폭발적으로 몰려드는 것이다. 이런 미계약분을 '주워담는다'는 의미로 '줍줍족(族)'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다. 이상우 유진투자증권 연구위원은 "정부의 대출 규제 때 이미 예상됐던 일"이라며 "자금이 부족해 집이 없는 무주택자의 대출도 강력하게 제한했으니, 결국 청약마저 대출이 필요 없는 현금 부자들을 위한 시장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줍줍족' 신조어 생겨난 요지경 청약
지난주 마감한 '청량리역 한양수자인 192' 사전(事前) 무순위청약엔 1만4376명이 신청했다. 사전 무순위청약은 1·2순위 분양 전, 미계약 물량에 대해 예약받는 제도다. 전체 1120가구가 모두 미계약되더라도 경쟁률이 12.8대1에 달한다. 반면 청약 점수와 조건을 따져야 하는 일반 분양 경쟁률은 4.64대1에 불과했을 정도로 관심이 떨어졌다. 지난해 4분기 서울 아파트 청약 평균 경쟁률은 37.5대1이었다. 일반 분양에선 경쟁률이 저조한 반면, 미계약분에 수요자들이 몰려드는 현상이 생긴 것이다.

무주택자는 1순위 분양 점수와 조건의 문턱을 넘지 못하거나, 당첨된다고 가정하더라도 자금 마련이 어려워 청약 포기를 택한다. 직장인 김모(32)씨는 "현재 청약점수가 21점인데, 인기 아파트 청약 당첨을 노리기엔 턱없이 부족한 점수"라며 "설령 당첨된다 하더라도 대출이 줄어들면서 집값 마련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반대로 미계약분 분양은 주택 보유 여부에 상관없이 19세 이상 성인이면 누구나 신청 가능하고, 가점과 관계없이 추첨을 통해 주인을 뽑아 제약이 거의 없다. 인터넷에선 이런 미계약 분양 신청자들을 '줍줍족'이라 부른다.



서울 30평 아파트, 중도금 대출 "불가"
사고 싶은 사람은 많은데 청약에선 미계약이 속출하는 원인은 '대출 규제'와 '훌쩍 오른 아파트값(시세)'이다. 9억원이 넘는 아파트는 공공기관 HUG(주택도시보증공사)의 분양보증이 나오지 않아 중도금 대출을 받기 어렵다. 일부 시행사가 자체 보증을 통해 9억원이 넘는 아파트도 중도금 대출을 알선해주지만, 금리 부담이 큰 편이다.

문제는 지난해 집값이 급등하면서 서울 시내에서 분양가 9억원 이하 아파트를 찾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작년 4분기 서울 3.3㎡당 평균 분양가는 3550만원(직방 조사)에 달했다. '30평 아파트' 평균 분양가가 10억원이 넘는 것이다. 심교언 건국대 교수는 "무주택 실수요자가 청약에 당첨되면 예외적으로 추가 대출을 허용해 주거나, 가점이 낮은 무주택자에게는 특별혜택을 주는 제도 보완을 통해 무주택자들이 청약을 통해 내 집 마련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전(事前) 무순위 청약
청약에 당첨되고도 계약하지 않는 ‘미계약’에 대비해 1~2순위 청약에 앞서 미리 신청자를 받아두는 제도. 올해 2월 처음 도입됐다.
부동산 임경업 기자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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