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원을 1원으로…고개드는 리디노미네이션

1000원을 1원으로…고개드는 리디노미네이션
 
화폐개혁 논쟁 불붙는다
與의원들 공론화 본격 나서

"경제규모 맞게 단위 조정해야" vs
"경제 불안 부르고 물가 자극"

< 커피 한잔에 3.5원? > 리디노미네이션 논의와 무관하게 시장에서는 이미 1000원을 1원으로 줄여 표기하는 곳이 적지 않다. 서울 중림동의 한 카페는 커피 가격으로 3500원 대신 3.5로 표기하고 있다.  /김범준 기자 bjk07@hankyung.com

정치권이 리디노미네이션(화폐 단위 변경)을 공론화한다. 화폐 단위를 1000원에서 1원으로 변경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과 편익 등을 따져보고 여론을 조성하겠다는 취지다.



17일 정치권에 따르면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이원욱·심기준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은 다음달 13일 국회에서 ‘리디노미네이션을 논한다’라는 이름의 정책 토론회를 열기로 했다. 여당 의원들이 이 주제로 공개 토론회를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기재위 소속 박명재 자유한국당 의원 등도 토론회에 참석할 예정이다. 2003~2004년 노무현 정부 때 한국은행이 리디노미네이션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논의에 불이 붙었지만 인플레이션을 우려한 기획재정부가 반대해 흐지부지됐다.


정치권을 중심으로 리디노미네이션 목소리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은 “지금이 적기”라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여권 관계자는 “1인당 국민소득이 3만달러를 넘어선 이후 화폐 단위도 국격(國格)에 맞게 조정해야 한다는 여론이 커졌다”며 “최근 물가상승률이 낮아 물가를 자극할 우려도 작다”고 말했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도 지난달 25일 국회 업무보고에서 “논의를 시작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부정적 의견도 적지 않다. 수조~수십조원의 사회적 비용을 들여야 하지만 경제적 편익은 여전히 불확실하다는 점에서다. 여권이 경기 부양을 위해 무리수를 두는 게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 원장은 페이스북 글을 통해 “최저임금 급등에 이어 또 하나의 생체실험으로 경제를 아주 망가뜨릴 작정이 아니라면 (하지 말아야 한다)”이라며 “금융시장 혼란 등 부작용이 클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격에 맞게 화폐 단위 조정해야" vs "경제 혼란만 커질 것"
“비용보다 편익이 크다. 한국 경제 규모를 감안할 때 더 이상 논의를 미루면 안 된다.”

“효과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경기부양 카드로 쓴다면 부작용만 생길 것이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을 주축으로 리디노미네이션을 위한 여론 조성에 나서면서 이를 둘러싼 찬반 논쟁이 커지고 있다. 논의가 본격화되면 15년 만이다. 2004년 노무현 정부 때 여당과 한국은행 주축으로 1000원을 1환으로 바꾸는 리디노미네이션을 추진했다가 물가 상승을 우려한 기획재정부의 반대와 부정적 여론에 밀려 무산된 바 있다.

전문가 중에서는 이후 경제 규모가 한층 커지고 환경도 달라진 만큼 제대로 논의해볼 때가 됐다는 목소리가 늘고 있다. 다만 방향성을 갖지 않고, 순수하게 한국 경제에 도움이 되느냐만 놓고 논의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실물경제 여건이 녹록지 않은 상황에서 섣부르게 시행했다가 오히려 경제불안 및 시장 충격만 키울지 모른다는 우려도 있는 게 사실이다.

경(京) 단위 등장에 커진 단위 논쟁
리디노미네이션은 과거 두 차례 있었다. 1953년 6·25전쟁으로 물가가 가파르게 오르자 100원을 1환으로 바꿨다. 1963년엔 지하경제 양성화를 위해 10환을 지금의 1원으로 바꿨다. 이후 리디노미네이션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간간이 거론됐지만 물가자극 등의 우려 때문에 없던 일이 되곤 했다. 2004년 노무현 정부 때 당시 박승 한국은행 총재도 필요성을 역설하며 힘을 보탰지만 부작용을 우려한 정부 부처의 반발이 커지자 논의가 중단됐다.

여당과 학계 찬성론자들은 논의의 적기가 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사용자 편의성 차원에서 손볼 때가 됐다는 점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숫자에 ‘0’이 지나치게 많아 불편한 수준까지 왔다는 것이다. 실제 2017년 기준 국민순자산은 1경3817조5000억원에 달하는 등 ‘경’ 단위가 통계 곳곳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0이 16개가 붙는다.

국격을 높이는 차원이라는 목소리도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은 물론 웬만한 개발도상국 중에서도 달러화 대비 환율이 1000단위인 나라는 한국 외에 찾기 힘들다. ‘원’의 액면 가치가 상대적으로 떨어지다 보니 국가 이미지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논리다.

박승 전 한은 총재는 17일 본지와의 통화에서 “1962년 현재 화폐가 도입된 이후 물가가 60배 오르고 1인당 국민소득(GNI)은 400배가 늘었다”며 “화폐는 커진 국가 경제와 위상을 반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인실 한국경제학회장(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도 “경제 규모가 커져 표기에 불편한 수준까지 도달한 데다 최근 물가가 낮아 인플레이션 우려가 적어진 만큼 시행을 검토해봐야 한다”며 찬성 목소리를 냈다.



"경기 살리려고 무리수” 지적도
하지만 민간 연구소나 학계에선 여전히 반대 의견이 팽배하다. 한 민간 경제연구소 거시경제 담당자는 “1달러를 1000원에 바꾸다가 1원에 바꾸면 국격이 올라간다는 논리는 설득력이 없다”며 “일본도 엔·달러 환율이 달러당 110엔 수준이지만 이 때문에 국격에 떨어지진 않는다”고 반박했다.

물가를 자극할 것이란 우려도 여전하다. 1000원이 1원이 되면 800~900원짜리 물건은 0.8원, 0.9원이 아니라 1원에 수렴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특히 잡화 등 서민 제품 가격이 가장 먼저 오를 수 있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경기침체 상황에서 리디노미네이션은 하강 속도를 더 높이는 악재가 될지 모른다”며 “경기가 상승 반전하는 것을 확인한 뒤 논의해도 늦지 않다”고 설명했다.

여당 일각에서도 여전히 부정적인 기류가 있다. 한 여당 의원은 “실제 리디노미네이션이 안착하기까지는 상당한 비용 부담과 혼란을 각오해야 할 것”이라며 “리스크가 큰 반면 국격 상승이나, 내수진작, 지하자금 양성화 등의 기대 효과가 얼마나 클지는 미지수”라고 말했다.
고경봉/성수영/김소현 기자 kgb@hankyung.com 한국경제
케이콘텐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