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사우나의 직원 [임철순]


어느 사우나의 직원 [임철순]

www.freecolumn.co.kr

어느 사우나의 직원

2019.04.09

내가 다니는 스포츠 센터의 사우나는 규모가 꽤 큽니다. 평일이건 주말이건 이용자가 아주 많습니다. 이곳 직원은 일거리가 많아 고달플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 정규직도 아닐 것입니다. 

최근 사우나의 직원이 바뀌었습니다. 입구와 라커 주변이 좀 깔끔해지고 덜 어지러워진 이유를 궁금해 하다가 담당자가 바뀐 걸 뒤늦게 알게 됐습니다. 50대로 짐작되는 그 직원은 얼핏 몽골 사람을 연상케 합니다. 체격은 그리 크지 않지만 뼈대가 굵어 단단해 보이고, 머리가 짧고 얼굴은 둥근 편인데 광대뼈가 약간 튀어나왔습니다. 

유심히 살펴보니 그는 한마디로 끝없이 부지런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보지 못한 날은 더러 있지만 그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있거나 손님과 잡담하는 걸 본 적은 없습니다. 운동복을 크기별로 개어 쌓아놓고, 젖은 운동복과 수건이 담긴 빨래 통을 바퀴 굴려서 옮기고, 탕 내의 각종 물품을 정리하고, 화장실을 청소하고 휴지를 새로 끼우느라 잠시도 쉬지 않습니다.

누구나 잘 아는 일이지만 사우나 손님들은 물건을 함부로 쓰고 아무데나 버리고 물을 아끼지도 않습니다. 몸의 물기를 다 닦지 않은 채 여기저기 걸어 다녀 바닥에 물을 떨어뜨리고, 흠뻑 젖은 수건을 걸레처럼 발로 질질 밀고 다니다가 아무 데나 팽개쳐둡니다. 스킨로션을 온몸 여기저기에 처바르거나 머리를 말리다 선풍기를 켜놓고 가버리는 사람도 많습니다(즤네 집 거면 그렇게 하겠어?). 같은 손님인 내가 화가 날 지경입니다. 

하지만 그 직원은 찡그리는 일 없이 늘 뒤치다꺼리를 잘해 손님들을 미안하게 만듭니다. 사우나는 수영장 이용자도 함께 쓰는데, 수영 강습이 끝난 초등학생 손님들이 들어오면 뛰고 떠들어 정신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꼬마손님들에게 아버지나 삼촌처럼 친절하고 자상하게 대해줍니다. 신발을 신발장에 넣지 않고 사우나 입구에 벗어놓는 사람들도 많아 늘 경황없는 상가(喪家)처럼 신발이 어지럽게 널려 있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쉴 새 없이 쓸고 닦자 요즘은 그런 사람들도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그는 마주치는 손님들마다 반갑게 인사를 합니다. 나가는 사람에게는 “안녕히 가십시오”나 “또 오세요”가 아니라 “내일 뵙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합니다. 며칠 전엔 목욕을 마치고 나오는데 그가 “회원님, 잠깐만요” 하고 불러 세우더니 내 뒤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말려 들어간 바짓단을 펴주기까지 했습니다. 

한번은 탕 내의 벽에서 물이 계속 흘러나오기에 마침 옆에 온 그를 붙잡고 이야기했더니 왜 그런 일이 생기는지를 자세하게, 좀 지루할 정도로 친절하게 설명하더군요. 내가 걱정스러워하는 것 같자 안심시키려는 취지였습니다. 사우나시설의 구조와 현황에 대해 정밀하게 파악하지 않고는 해줄 수 없는 설명이었습니다. 

그를 보면서 자신이 속한 세상을 바꾸는 사람의 노력에 대해, 그 방법에 대해, 사람을 고르고 쓰는 문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보다 먼저 있던 직원도 게으른 사람은 아니었고 나름대로 성실했지만 지금 직원과 같은 변화를 이끌어내지는 못했습니다. 그 둘의 차이가 무엇인가도 생각하게 됐습니다. 

누구든 어느 조직이든 변화와 개혁은 솔선수범과 상호 소통 없이 이루어낼 수 없습니다. 자신이 몸담은 곳을 더 낫고 생활하기 좋게 바꾸는 것은 언제나 말이나 구호보다 부지런하고 사심 없는 실천입니다.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고 먼저 직원의 흠을 잡거나 여건만 탓하고 있으면 달라질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사우나는 특별히 자랑할 만한 게 있는 곳이 아닙니다. 수건이 걸레로 보일 정도로 해진 것도 많고, 운동복은 정말 세탁을 했는지 의심스럽게 불결하고 낡아 보여 그만 버렸으면 싶은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열악한 여건에서도 최선을 다해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즐겁게 해내고 있습니다. 때를 미는 것은 그의 담당이 아니지만 나는 그를 보면서 조금씩 내 때가 벗겨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습니다. 공직자들이 이런 사람을 본받았으면 좋겠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자유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임철순(任喆淳)

한국일보 편집국장 주필, 이투데이 이사 겸 주필 역임. 현재 자유칼럼그룹 공동 대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시니어희망공동체 이사장. 한국기자상, 위암 장지연상, 삼성언론상 등 수상. 저서‘노래도 늙는구나’, '효자손으로도 때리지 말라’,‘1개월 인턴기자와 40년 저널리스트가 만나다(전자책)’,‘내가 지키는 글쓰기 원칙(공저)’'마르지 않는 붓'(공저).  

Copyright ⓒ 2006 자유칼럼그룹.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freecolumn.co.kr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