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시대, 돌이 모자라서 끝난 게 아니다 [김홍묵]


석기시대, 돌이 모자라서 끝난 게 아니다 [김홍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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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기시대, 돌이 모자라서 끝난 게 아니다

2019.04.03

봄바람보다 먼저 찾아온 선거 바람이 꽃샘추위보다 매섭습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김정은의 수석 대변인’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도록 해 달라”고 한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의 국회 대표 연설 한마디가 여권과 청와대를 들쑤셔 놓았습니다.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있지도 않은 ‘국가원수 모독죄’를 들먹였고, 이해식 대변인은 이 표현을 처음 쓴 블룸버그통신 ’검은 머리 외신기자’(이유경)의 기사를 두고 “미국 국적 통신사의 외피를 쓰고 국가원수를 모욕한 매국에 가까운 내용”이라고 매도했습니다.
한국당은 “작년 9월 기사가 처음 났을 때는 아무 말도 못하더니…”라며 반격했습니다.

그 돌풍이 잦아지나 싶었는데 문대통령은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이 연루되었던 별장 성 접대 사건과 배우 장자연 자살 사건 등 해묵은 사안과, 최근 물의를 빚고 있는 버닝썬클럽 사건을 철저히 파헤치라고 검찰과 경찰에 주문했습니다.
범여권의 연동형 비례대표제 및 패스트트랙 선거법 개정 공방에서 수세인 한국당은 지난해 자치단체 선거 직전에 있었던 울산경찰청(당시 청장 황운하)의 울산 시장실(당시 시장 김기현) 압수수색은 검찰이 무혐의 처분한 만큼 특검을 해야 한다고 맞불을 놓았습니다.
누가 봐도 이번 보궐선거와 내년 4월 총선과 무관하지 않은 상대편 흠집 내기 공방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지난해 발생한 포항 지진의 원인이 지열발전소 건설 때문이라는 발표에 정부는 잽싸게 한 번도 가동하지 않은 지열발전소 폐기를 지시했습니다. 민주당은 발전소 건설은 이명박 정권 때 착공한 것이라며 전 정권 탓으로 돌렸습니다.
한국당은 ‘천연 다이아몬드 같은’ 김연철 통일부 장관 후보자의 사퇴, 연평해전과 천안함 폭침을 ‘불미스러운 충돌’이라고 한 정경두 국방부 장관의 발언을 질타했습니다.
법이 모자라 나라가 허우적거리고, 말이 부족해 정의가 사그라지거나 글이 짧아서 도덕이 뒤틀리는 것도 아닌데, 정치판은 오로지 집권과 다음 선거에만 일척(一擲)하는 행태입니다.

# 정책 아닌 혀로만 싸우는 정치판

이런 꼴들을 보면서 40여 년 전 ‘석유황제’로 불렸던 야마니(Ahmed Yamani)의 말을 새롭게 새겨봅니다.
“석기시대가 종말을 고한 것은 돌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다. 석유시대도 종말을 고하겠지만 그것이 석유가 부족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라고 한 미래예측입니다.
야마니는 1962년 사우디아라비아 석유장관에 임명돼 실각할 때까지 24년을 재임했습니다. 그는 아랍 산유국의 석유 무기화를 성공시키고, 사분오열된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단합을 이끌어 내면서 세계 석유시장을 쥐락펴락해 온 강자였습니다.

석유시대에 접어들어 미국의 석유왕 존 록펠러와 함께 석유 무기화의 양대 산맥으로 꼽히는 야마니의 생애는 석유 그 자체였습니다.
1930년 메카에서 태어난 야마니는 이집트 카이로대학을 나와 미국 뉴욕대학 및 하버드대학 법과대학원을 수료했습니다. 귀국하여 국무위원회의 고문(1958~60), 법무 담당 국무장관(1960~62)을 역임했습니다. 1962년 아람코석유회사 중역과 석유광물장관을 겸직했습니다.
이후 석유광물자원공단 회장(1963), OPEC 사무국장(1968~69)을 거쳐 의장(1974~75)으로 활약했습니다. 장관직에서 물러난 후로는 일체의 공직을 맡지 않았습니다.

1968년 10월 29일 그 석유황제 야마니 시대가 종말을 고했습니다. 국영 사우디TV의 ‘야마니 해임’이라는 짤막한 보도 외에는 야마니 자신도 아무런 언질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억측이 난무했습니다. <석유황제 야마니> 저자 제프리 로빈슨은 실각 원인을 국제 무기상과 왕실의 비자금 확보 음모로 추정했습니다. 당시 필요 이상으로 전투기를 구입해 거액의 리베이트를 챙기려는 왕실의 요구에 응하려면 더 많은 석유를 팔아야 했습니다. 야마니는 그럴 경우 OPEC의 단합이 깨진다는 이유로 반대했다는 주장입니다. 국민과 시장이 불신하는 자리에 연연하지만 않고, 소신과 양심에 따라 장관직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야마니가 실력을 휘두르던 시절 전 세계는 석유파동으로 휘청댔습니다.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이 원인이 된 1차 (1973~1974), 1978년 이란 혁명으로 발단된 2차(1978~1981) 오일쇼크는 석유 수입국들의 경제를 혼란과 침체로 몰아갔습니다.
△생산비 상승 △인플레이션 가속화 △성장률 둔화 △무역수지 악화 △국제 금융질서 교란 등의 현상입니다.
우리나라도 큰 폭의 물가 상승, 경제성장률 급락, 경상수지 적자폭 급증, 외채 증가로 심한 몸살을 앓았습니다.

# 막장 돌진보다 윈윈하는 통찰을

1973년 당시 1차 에너지 소비에서 석유가 차지하는 비율이 47%, 서방 선진국은 53%를 웃돌았습니다. 세계 석유공급 구조상 OPEC의 위상은 절정에 달했습니다. 그 석유 위력의 중심에 서 있던 야마니가 훗날 석유시대의 종말을 예고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일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산유국 정권과 석유 메이저들의 농간·투기로 강조된 ‘석유 고갈론’에 대한 야마니의 회의론에 근거한 미래예측이 아닌가 합니다. 그의 석유정책 기조는 고유가가 지속될 경우 석유 소비 감소로 이어지고, 세계 경제는 경제적 재앙 또는 자원의 저주(resource curse)로 이어질 수 있다는 통찰력이었습니다.

실제로 20세기 초반부터 제기되어 온 석유 고갈 주장은 번번이 빗나갔습니다. 1914년 미국 광산국의 ‘남은 석유 매장량은 겨우 10년치’, 1939년 미 국무부의 ‘13년 뒤면 석유 고갈’, 1955년 ‘앞으로 남은 석유는 35년분’ 등입니다. 2010년을 석유채굴 정점으로 본 예상도 틀렸습니다. 대안 기술 개발과 비전통 석유 채굴이 고갈론을 잠재웠습니다.
새로운 유전 발굴과 채굴량 증가, 셰일 오일·오일 샌드 개발에다 자동차 연비와 주택 난방율 개선, 가전제품 효율성 향상이 에너지 절약을 선도했습니다. 상온 핵융합 발전, 우주 태양광 발전 기술도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석유가 고갈되기 훨씬 전에 석유시대의 종말을 예견한 야마니처럼 우리 정치판에도 선거를 앞둔 코앞의 이해가 아닌, 모두가 박수 치고 목표가 명확하며 지속 가능한 미래정책들이 쏟아져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요.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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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홍묵

경북고,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동아일보 기자, 대구방송 이사로 24년간 언론계종사.  ㈜청구상무, 서울시 사회복지협의회 사무총장, ㈜화진 전무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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