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정조의 건축]각루(角樓)


[끝나지 않은 정조의 건축]각루(角樓)

김관수 여유당건축사사무소 ㈜문화재실측설계기술자

 


   현재 수원화성 사방(四方)에는 각루가 있지만, 다산의 기본설계(성설)에도 없었고 1차 공사가 끝난 1795년 초 혜경궁 환갑을 치르던 때까지도 보이지 않는다. 을묘년 수원 행차 시기 중 훈련을 위해 만든 주간 성조도(城操圖, 훈련도)와 야간 훈련을 위한 서장대성조도(西將臺城操圖)에서도 각루는 보이지 않는다. 그림에는 동북각루는 보이지만, 각루나 방화수류정이라는 용어 대신 용두정(龍頭亭)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각루는 위계가 높은 곳에 세워져 절대 권력자의 힘을 상징했다. 중국 황성에는 각루가 존재하나 한양도성에는 없고 경복궁 등 일부 궁궐에만 있어 함부로 설치하는 건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각루는 지형적으로 각(角)이 있는 궁궐이나 성곽 울타리에만 설치되는 것으로, 수원화성과 같은 원형의 성곽은 각이 없으므로 각루 설치의 의미가 없다.


수원화성에 각루를 설치하는 것은 위계적으로나 지형적으로 불합리한 것인데 굳이 만든 것은 정조의 의지에 의한 것이다. 수원화성은 1789년 읍치를 옮길 때부터 고려된 것은 아니었다. 3년이 지난 1792년 혜경궁의 환갑잔치를 화성행궁에서 치르고자 축성을 계획하게 된다.


우리가 생각한 만큼 정조는 치밀한 장기적 계획을 세우지는 않았던 것 같다. 팔달산 동측 기슭에 수원 신읍을 조성하고 몇 년 지나지 않아 혜경궁이 머물 행궁을 추가로 배치하면서 도시 계획을 전면 수정했듯이 축성도 공사 도중 설계 변경이 자주 일어난다. 사실 각루는 실용적인 면에서만 보면 수원화성의 지형 환경과 맞지 않고, 성곽 내부에 위치하여 방어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비합리적인 건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각루가 이런 여러 문제를 노정(露呈)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설치된 이유에 대해서 ‘화성을 쌓은 종적을 기록한 비문’에 잘 나타나 있다. ‘이곳이 기호(畿湖)의 요충지이기 때문도 아니고 5천명 병사와 군마가 있기 때문도 아니라 한편으로는 선침(仙寢)을 위해서이고 한편으로는 행궁을 위함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엄청난 비용을 들여 성곽을 만든 것은 바로 아버지 사도의 묘(현륭원)와 어머니를 위한 행궁 때문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축성(築城)을 시작할 때 정조는 본심을 밝히지 못했다. 이유는 처음 현륭원(사도세자의 묘)을 조성할 당시 비용 문제로 신료들의 반대가 있었기 때문에 정조로서도 축성 감행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정조는 1793년 12월 10일 굳이 100년 전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의 반계수록(磻溪隨錄)을 언급한다. ‘팔달산 인근으로 읍치를 옮기고 성을 쌓을 수 있는 곳’이라는 반계의 말을 빌어 수원화성이 한강 남쪽의 요충지라는 점을 강조하고 축성의 근거와 명분으로 삼는다.


수원 방화수류정 (동북각루)/다음블로그 '드넓은 세상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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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성곽 계획 시기부터 깊이 관여했다. 공사가 시작되자 현장에서도 본인의 뜻대로 성곽 형태를 나뭇잎 모양으로 변경하고 성곽길이는 3천600보에서 4천600보로 늘린다. 또 공사 기간이 예상보다 단축되자 자신감이 솟았는지 성곽을 쌓은 것은 요충지이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위한 것임을 거침없이 말한다.


정조는 수원화성이 지방에 있는 일반 읍성이 아니라 왕(王)이 있는 도성(都城)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다. 수원화성에 옹성과 적대, 봉돈, 공심돈 등 새로운 성곽시설이 설치되었지만, 이 시설만으로 격이 높아진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원형의 성곽에 각루를 설치해서라도 도성의 격에 맞추고 싶어했다. 정조가 각루를 설치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은 축성 1차 공사 때 만든 용두정(龍頭亭) 때문으로 보인다.


       


축성 이전 현지를 답사할 때 현륭원에서 만났던 용(용연과 용두)을 다시 보게 되어 반가운 나머지 용에게 뿔을 선물했다는 용두정(龍頭亭) 이야기는 이전 편에서 언급한 바 있다. 용두정의 ‘십자각 형태’를 보고 각루를 착안한 정조는 축성공사 막바지에 나머지 세 방향에 각루를 추가한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각루를 통해 수원화성은 왕의 도시로서 위계를 갖추게 된다.

경기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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