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에 떠난 이들을 생각하며 [방석순]

2018년에 떠난 이들을 생각하며 [방석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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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에 떠난 이들을 생각하며

2018.12.28

2018년도 사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사흘 전인 오늘과 사흘 후의 내일이 어떻게 다를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해를 넘기는 이맘때면 으레 지난 한 해를 돌아보게 됩니다. 또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다가 한발 앞서 떠난 이들의 삶을 살펴보게 됩니다. 그들의 족적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가 자신의 떠날 때를 대비하려는 마음가짐이기도 합니다.

올 한 해에도 많은 이들이 우리 곁을 떠나갔습니다. 그 가운데 특히 금세기를 대표하는 천체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Stephen William Hawking, 1942.1.8.~2018.3.14.)이 먼저 생각납니다. 과학에 무지한 저로서는 ‘(태양 흑점의) 특이점 정리’니 ‘(무한) 우주론’ 등 그의 과학 이론이나 업적보다는 평생 그를 부자유 속에 가둬놓은 육신, 그에 굴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연구에 매진한 그의 의지와 열정에 감동하게 됩니다. 

호킹은 옥스퍼드대학교 4학년 재학 중 벌써 계단에서 구르는 등 발병 징후를 보였습니다. 케임브리지대학원에 다닐 때는 루게릭 진단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의사가 2년 정도의 시한부 삶을 예고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낙담하는 대신 놀라운 투지로 연구에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회고담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나는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내가 처형당하는 꿈을 꿨다. 갑자기 나는 내 사형 집행이 연기된다면 내가 할 일이 너무 많으리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나 스스로가 놀랍게도 나는 과거보다 나의 삶을 더 즐기게 되었다.”

호킹은 32세에 영국 왕립학회 회원, 이듬해 케임브리지대학교 응용수학 및 이론물리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37세에는 아이작 뉴턴 등 선배 천재 학자들이 거쳐 간 루카스(Lucas) 석좌교수의 명예를 얻었습니다. 43세 때 폐렴으로 목소리마저 잃었으나 손가락과 눈썹의 운동을 인지하는 특수장치와 컴퓨터를 이용해 계속해서 강의하고 많은 책을 썼습니다. 그가 쓴 <시간의 역사(A Brief History of Time)>는 세계적으로 1천만 권이나 팔렸다고 합니다. 그 얄팍한 책은 과학 문외한인 제게도 천체의 생성과 소멸, 우주를 관통하는 자연법칙을 다소간 이해하는 기쁨을 안겨 주었습니다. 지난 3월 76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우주를 향한 그의 연구열과 의지는 결코 굳어가는 자신의 육체 속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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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영국 식민지 가나에서 태어나 유엔 말단 직원에서 사무총장(재임: 1997~2006)에까지 오른 코피 아난(Kofi Annan, 1938.4.8~2018.8.17.)도 오래 기억하게 될 인물입니다. 그는 재임 9년여 동안 유엔 활동을 안보, 개발, 인권에 집중함으로써 퇴색되어가던 유엔을 다시 국제사회의 중심 무대로 올려놓았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특유의 친화력과 업무 역량은 한때 의기소침하던 유엔 직원들에게 많은 영감과 자신감을 안겨 주었다고 합니다. 2001년 유엔 사무총장에게 처음 수여된 노벨 평화상은 강대국들의 첨예한 대립으로 고달픈 임무를 수행하던 그와 유엔에 대한 격려였을 것입니다.

베트남 근현대사의 산증인으로 꼽히는 도 므어이(Do Muoi, 1917. 2. 2.~2018.10.1.)는 한 세기를 살고 101세에 타계했습니다. 본명은 응우옌 주이 꽁(Nguyễn Duy Cống).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19세에 반(反)프랑스 독립투쟁에 뛰어들었습니다. 식민 정부에 붙들려 10년 형을 살다 4년 만에 탈출, 이후 '열 번 탈출한다', ‘열 번 승리했다’는 뜻의 별명 '도 므어이'로 불리게 됐다고 합니다. 그는 통일 전쟁 후 피폐한 베트남 경제의 부흥을 위해 과감히 시장경제를 도입해 오늘과 같은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1991년 권력 서열 1위인 공산당 서기장에 올랐으나 평생 변함없이 근면하고 청빈한 생활로 국민적 추앙을 받았습니다.

국내 정치계에서는 풍운아로 불려온 김종필(金鍾泌, 1926.1.7.~2018.6.23.) 전 총리가 92세를 일기로 별세했습니다. 그는 일찍 30대에 고 박정희 대통령을 좇아 군사혁명에 가담했고, 군사정권에서 실세 국무총리로 국정을 이끌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김영삼, 김대중 정권 탄생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뉴욕타임스는 올해 타계한 특기할 인물을 소개하며 그에게 ‘South Korean Kingmaker'라는 설명을 붙여 놓았습니다. 군사혁명과 군사정권에 심한 알레르기를 가진 현 정부의 국민훈장 무궁화훈장 수여가 고인의 특이한 인생역정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그는 세상을 뜨기 전 주위 사람들에게 “정치는 허업(虛業)”이라고 했답니다. 몇 차례나 정권 창출에 기여했지만 끝내 자신의 뜻은 펼치지 못한 허탈감의 표현이었을까요. 메마른 우리 정치 풍토에서 유별나던 그의 풍류 또한 만족할 수 없었던 현실에 대한 자위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1950~1960년대 국내 영화계에서 김지미, 엄앵란과 함께 여성 트로이카로 인기경쟁을 벌였던 최은희(崔銀姬, 본명 최경순, 1926.11.20.~2018.4.16)는 향년 91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성춘향’,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등으로 사랑받던 그는 신상옥 감독과 함께 납북되었다 탈출하며 더욱 큰 관심을 모았지요. 1960년대 엄앵란과 짝을 이루어 청춘스타로 인기를 모으던 신성일(본명 강신영->강신성일, 1937.5.8.~2018.11.4.), 법대생 가수로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 ‘하숙생’, ‘진고개 신사’ 등 구수한 목소리의 히트송을 남긴 최희준(崔喜準, 본명 최성준 崔省準, 1936.5.30.~2018.8.24.)도 떠났습니다.

한국 근대문학사 연구에 탁월한 업적을 남긴 국문학자 김윤식(金允植, 1936.8.10~2018.10.25.), <광장>의 작가 최인훈(崔仁勳, 1936.4.13.~2018.7.23.), 법대를 졸업하고도 가야금 명인, 작곡가로 국악의 지평을 넓힌 황병기(黃秉冀, 1936.5.31.~2018.1.31.), 재벌그룹 LG의 총수 구본무(具本茂, 1945.2.10.~2018.5.20.), 군사정권에 맞서 민주화추진협의회를 이끌었던 전 국회의원 김상현(金相賢, 1935.12.6.~2018.4.18.), 미국에 태권도를 보급하고, 무하마드 알리의 서울 방문을 주선했던 이준구(李俊九, 1932.1.7.~2018.4.30.), 음향효과의 달인 김벌래(본명 김평호(1941.7.28. ~2018.5.21.) 등이 모두 올해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해외 정치 인물로는 소련을 맹주로 한 공산 블록과의 냉전시대를 종식하고 핵 군축의 기틀을 닦은 미국 41대 대통령 조지 부시(George H.W. Bush, 1924.6.12.~2018.11.30.), 미국 공화당 후보로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대결했던 소신파 상원의원 존 매케인(John McCain, 1936.8.29.~ 2018.8.25.)이 타계했습니다.

문화 스포츠 분야에서는 풍성한 몸매로 날씬한 테너 호세 카레라스와 함께 바르셀로나 올림픽 개막 공연에서 열창하던 스페인의 세계적 소프라노 몽세라 카바예(Montserrat Caballé, 1933.4.12.~ 2018.10.6.), ‘마지막 황제’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로 화제를 모은 이탈리아 영화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Bernardo Bertolucci, 1941.3.16.~2018.11.26.), 스파이더맨, 헐크, 아이언맨 등 슈퍼 히어로 캐릭터들을 만들어낸 미국 만화업계의 거물 스탠 리(Stanley Martin Lieber, 1922.12.28~2018.11.12), 1984년 LA 올림픽과 유럽축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 프랑스 축구를 유럽 일류로 끌어올린 명감독 앙리 미셸(Henri Michel, 1947.10.29.~2018.4.24.) 등이 올해 영면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여러 가지 사연을 안은 채 비명에 떠난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노동 운동과 진보 정치에 앞장섰던 노회찬(魯會燦, 1956.8.31.~2018.7.23.) 전 의원은 2016년 총선에 앞서 불법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에 시달리다 아파트에서 투신, 자진했습니다. 혐의사실을 시인한 유서에도 불구하고 진보 정파의 대표주자였던 그의 비보에는 아쉬움을 나타내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이재수(李載壽, 1958년~2018.12.7.) 전 국군기무사령관도 세월호 유가족 사찰 혐의로 휘하 부대장들이 구속기소되는 가운데 사찰을 지시한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는 직무상 필요했던 조처에 대한 뒤늦은 수사에 안타까움을 피력하며, 부하들에 대한 선처를 호소하는 유서를 남겨 현 정부의 무리한 적폐 청산 작업에 대한 논란을 불렀습니다.

‘사랑과 야망’ 등 TV 드라마에서의 열연으로 주목받았던 조민기(趙珉基, 본명 조병기 1965.11.5.~ 2018.3.9.)는 줄기차게 펼쳐지고 있는 국내 미투운동을 통해 성추행 의혹이 불거지자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모교 청주대학교 연극학과에서 강의해온 그는 제자들의 성추행 고발로 정직처분을 받았고, 경찰 조사를 앞둔 상황에서 끝내 비극적인 결말을 선택하고 말았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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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방석순

스포츠서울 편집국 부국장, 경영기획실장, 2002월드컵조직위원회 홍보실장 역임. 올림픽, 월드컵축구 등 국제경기 현장 취재. 스포츠와 미디어, 체육청소년 문제가 주관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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