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김치가 있는 밥상 [한만수]


김장김치가 있는 밥상 [한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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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김치가 있는 밥상

2018.11.09

김치는 세계인의 표준 발효식품으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2006년 세계적 권위지 『Health』지가 선정한 '세계 5대 건강식품’ 한국의 김치, 일본의 낫또, 그리스의 요구르트, 스페인의 올리브 오일 중에 맨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인공적이지 않고 밭에서 얻을 수 있는 배추에, 마늘, 고춧가루, 생강, 파, 무 등의 천연재료를 가미해서 발효시킨 김치의 역사는 고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고려 시대의 김치류에는 지금과는 달리 고춧가루나 젓갈, 육류를 쓰지 않았습니다. 소금을 뿌린 채소에 천초, 마늘, 생강 등의 향신료만 섞어서 재워두면 채소에 있는 수분이 빠져나와 채소 자체가 소금물에 가라앉는 침지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침채'라는 특이한 이름이 붙게 되었습니다.

조선 중중 때의 『벽온방(僻瘟方)』에 "딤채국(菹汁)을 집안 사람이 다 먹어라." 하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저(菹, 김치)'를 우리말로 '딤채'라고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국어학자 박갑수는 김치의 어원에 대해, '침채'가 '팀채'로 변하고 다시 '딤채'가 되었다가 구개음화하여 '김채', 다시 '김치'가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김치가 세계적인 건강식품으로 거듭나고 있지만 정작 종주국인 우리나라에서는 섭취량이 줄어들고 있는 추세입니다. 젊은 세대들이 김치보다는 반가공식품을 즐겨 먹는 추세이다 보니 김장을 하는 가정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20여 년 전에만 해도 11월이 되면 신문이나 방송에서 김장에 관한 뉴스를 수시로 내보냈습니다. 농촌뿐만 아니라 도심의 골목에서도 주부들이 대문을 열어 놓고 김장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김장하는 날이 단순히 ‘김치를 담그는 날’ 이상이었습니다. 그때는 어느 집이나 식구가 많아서 보통 100포기 이상 김장을 했습니다. 요즘에는 김장을 해도 배추김치만 하는 집이 많습니다. 겨우내 김치와 동치미 된장지개가 밥상을 점령하던 예전과 다르게 지금은 다른 반찬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1960년대에는 요즘과 다르게 11월 중순만 해도 냇가 얼음이 꽁꽁 얼었습니다. 집집마다 수도가 있거나, 우물이 있던 시절이 아니라서 리어커나 달구지에 소금에 절인 배추를 싣고 냇가로 나갑니다. 본격적으로 냇물에 절인 배추를 씻기 전에 모닥불부터 피웁니다.

고무장갑도 없던 시절인데도 칼바람에 아랑곳없이 소매를 겉어붙이고 얼음장 같은 찬물에 소금 절인 배추를 씻다 보면 손가락이 얼어 버리는 것처럼 아픕니다. 모닥불에 언 손을 쬐어가면서도 어느 누구도 힘들다며 얼굴을 찡그리지 않습니다. 절인 배춧잎을 쭉쭉 찢어 먹으면서도 내 가족에게 먹일 김장을 한다는 생각에 연신 웃음이 떠나지 않습니다. 냇물에서 소금기를 씻어낸 절인 배추를 다시 리어카나 달구지에 실어서 마당으로 옮깁니다. 그사이에 집주인을 비롯한 몇몇 이웃들은 부지런히 무를 채 썰고, 쪽파를 듬성듬성 썰고, 생강이며 마늘을 찹쌀풀죽으로 반죽을 한 고춧가루와 섞어 김칫속을 만들고 있습니다.

김장을 하는 집 마당에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직접 김장을 하는 분들만 계신 것이 아닙니다. 이웃집 할머니며, 학교 갔다가 온 아이들이며, 지나가는 동네 아줌마들도 들러서 구경합니다. 그러면 절인 배춧잎에 배춧속을 듬뿍 싸서 둘둘 말아서 구경하는 이들의 입에 넣어 줍니다. 입안이 터지도록 가득찬 김치를 우걱우걱 씹을 때의 고소하고 매콤한 맛은 찬바람을 날려 버립니다.

김장을 하는 날은 모내기나 추수를 하는 날처럼 하얀 쌀밥을 합니다. 커다란 양푼이나 바가지에 쌀밥을 고봉으로 퍼서 가운데 내놓습니다. 반찬 없이 그냥 먹기만 해도 입안에서 녹아 버리는 쌀밥에 김장김치를 쭉 찢어 먹으면 끊어질 것처럼 아픈 허리의 통증도 감쪽같이 사라져 버립니다.

어느 정도 김장이 마무리되어가면 아버지들의 일이 시작됩니다. 김장독이 들어갈 구덩이를 파기 전에 김장김치 맛을 봅니다. 요즘에 김장을 하면 수육은 기본입니다. 그 시절에는 잔치나 생일, 제삿날이나 고기를 맛볼 수 있습니다. 따뜻하게 데운 막걸리네 김장김치는 환상의 궁합입니다.

아버지는 몇 잔 막걸리에 노을이 진 얼굴로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담장 밑이나 뒤꼍에 김장독을 묻을 구덩이를 팝니다. 볏짚을 태워 소독을 한 항아리를 묻어 놓으면 김치를 넣기 시작합니다. 김치를 넣는 사이사이에 무를 손바닥 크기로 썰어서 넣습니다. 겨울에 대접 수북하게 무를 담아서 내놓으면 형제들끼리 경쟁을 하듯 젓가락으로 한 개씩 쿡 찍어 가져옵니다. 그 무 하나면 밥 한 그릇을 먹을 수 있습니다.

김치를 가득 채운 항아리에 뚜겅을 덮습니다. 뚜껑 위에 볏짚으로 엮은 이엉이나, 가마니를 덮는 것으로 김장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김장하는 데 도움을 주지 않았어도 노인들끼리 사는 집안이나, 형편이 어려워 김장할 형편이 되지 못하는 집에 몇 포기씩 나누어 준 빈 그릇을 물에 씻는 것으로 김장은 끝납니다.

김장을 한 날은 이런저런 뒷설거지를 하느라 그렇지 않아도 짧은 해가 지고도 한참 뒤에 저녁 밥상이 차려집니다. 문밖에는 찬바람이 서걱서걱 울어 대고 있거나, 눈이 싸륵싸륵 내리고 있어도 김장김치가 밥상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저녁밥상은 유난히 푸짐해 보입니다.

먹음직스럽게 양념이 된 김장김치를 쭉 찢어 밥 위에 얹어 먹노라면 얼굴이며 입술이나 옷에 양념이 묻기 마련입니다. 그 모습이 우습다고 깔깔거리면서도 숟가락은 부지런히 움직입니다.

겨우내 먹고 난 김치로 만든 부침개며, 찌개, 만두 등은 또 다른 별미입니다. 요즘에는 일부러 신김치를 만들어서 찌개를 끓여 파는 음식점도 많습니다. 그 밖에도 김치로 만들 수 있는 음식은 수십 가지에 이릅니다.

몇 년 전의 북경 조류인플루엔자 사태 이후 사스(SARS)와 조류인플루엔자(AI)에 김치는 탁월한 예방효과가 있다는 것이 영국 BBC, 미국 ABC 등 세계 언론에 보도되었습니다. 그 정도로 김치의 가치는 세계에 더 알려졌습니다. 최근에는 암세포의 증식을 막아준다는 연구도 입증돼 다시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김치는 그만큼 우리에게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음식입니다. 그런데도 간편하고 자극적인 맛의 패스트푸드와 인스턴트식품이 유행하면서 김치가 밥상에서 밀려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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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한만수

1990년부터 전업으로 소설을 쓰고 있음. 고려대학교 문학석사. 실천문학 장편소설 “하루” 등단. 대하장편소설 “금강” 전 15권 외 150여권 출간. 시집 “백수블루스”외 5권 출간. 이무영문학상 수상. 장편소설 “활” 문화예술진흥위원회 우수도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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