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나간 휴대폰 [김창식]


집 나간 휴대폰 [김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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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나간 휴대폰

2018.11.05

내 휴대폰은 중2인가 봐요. 수시로 집을 나갑니다. 주인을 닮아서 그런지도 모르겠군요. 휴대폰 가출은 재앙 중 재앙입니다. 그 황당함과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병가지상사’라고요? 저런! 기분이 어땠는지 자세한 내용은 생략합니다. 누구든 한 번쯤은 그 같은 경험이 있을 테니까요. 이럴수록 침착해야 합니다. 그런들 뾰족한 수가 없겠지만. 

하릴없는 일일지라도 밤으로의 긴 여로를 되짚어 사건을 재구성해야겠죠. 전방위적인 행방수색 끝에 돌아온 것은 지직지직 필름 끊기는 소리에 이은 암전(暗電), 뒤이어 기억의 조각들이 부스럭거리는 소리. ‘잘났다, 누가 그러래?’ ‘애 보기 부끄럽지도 않니?’ ‘발신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이쯤 해서 마음을 다잡아야겠죠. ‘일어날 일은 꼭 일어난다.’ ‘잘 가거라, 내 것이 아닌 사랑아. 잘 있거라, 내 것이 아닌 휴대폰아.’

실종신고 등 일련의 통과의례 절차를 마치고 집 부근 대리점을 찾았어요. 임시로 중고폰이라도 마련하려고요. 직원은 힙합 모자를 쓴 청년이었습니다. 다음은 양자(A:고객, B:직원) 간에 오간 대화를 녹음한 것입니다. 웬만하면 버튼을 누르는 세상이니까요. 아니 녹음 안 하고도 했다고, CCTV에 찍혔다고 겁주는 세상이잖아요.

A: 여기 직영대리점 맞죠?
B: 그런데요?
A: 다름 아니라 휴대폰을 분실했어요.
B: 그래서요?
A: 휴대폰을 잃어버렸다고요.
B: 그러니까 조심하셔야죠.

대화가 이렇게 진행되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최소한 “어쩌다 그러셨습니까?” “저런, 많이 힘드시죠?” “고객님,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인사치레 말이라도 오고가야 하는 것 아닌가요? 하다못해 “심심한 조의를 표합니다.” 같은 생뚱맞은 말일지라도 말예요. 지푸라기 한 자락이라도 붙잡고 싶은 사람한테. 아니 새치 한 올이라도 아쉬운 사람한테.

용암처럼, 아니 팥죽처럼 끓는 화를 가라앉히며 임시로 전화기를 구입할 절차와 장소를 문의하였지요.특이하게도 임대폰은 전국에서 몇 군데밖에 없는 대형 직영대리점이나 대리점의 윗선인 지사에서만 구입 가능하다는 황당한 답변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지사가 낫겠다 싶어 연락처를 알아보았어요. 다음은 A  B간에 이어진 대화 내용입니다.

A: 그럼 지사 전화번호 좀 가르쳐주시겠어요?
B: 모릅니다.
A: 아니 지사 전화번호를 모르다니요?

재차 물으니 A를 빤히 쳐다보던 B가 한 마디 툭 던져요. "그럼 제가 알면서도 안 가르쳐드렸겠어요?” 통신사의 지사는 4G 어쩌고 홍보에 사활을 걸면서도 내방 고객만 상대하기 때문에 그 흔한 대표 전화조차도 없다는 것입니다. A와 B 사이에 오간 대화는 그런대로 말이 될 듯도 합니다. 정황을 모르는 사람이면 끄덕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서와, 분위기, 의미 맥락을 따지면 본질에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불량한’ 언어유희였어요.

의문의 1패를 당한 후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이실직고하고 보상센터에 보험처리 절차를 알아보았습니다. 대체할 폰이 도착하려면 1주일이상 걸린다나요. 다음 날 통신사의 지사를 방문해 중고폰을 임시로 임대하였지요. 이제는 고생 끝. 임대폰을 내 것처럼 쓰다가 새 전화기가 오면 반납하면 되거든요. ‘룰루랄라’ 집으로 향하다 다시 지사로 발걸음을 돌려야 했습니다. 이번엔 충전기가 든 봉투를 잃어버린 것이에요.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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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창식

경복고, 한국외국어대학 독어과 졸업.수필가, 문화평론가. 
<한국산문> <시에> <시에티카> <문학청춘> 심사위원. 
흑구문학상, 조경희 수필문학상, 한국수필작가회 문학상 수상. 
수필집 <안경점의 그레트헨> <문영음文映音을 사랑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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