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강에 흐르던 백제의 시 [방석순]


백마강에 흐르던 백제의 시 [방석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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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강에 흐르던 백제의 시

2018.11.02

가을은 여행의 계절, 발로 눈으로 세상을 배우고 익히며 즐기는 계절입니다. 고교 동문 가족 80여 명이 올가을 여행으로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 부여를 찾았습니다. 여행 직전 현지 답사팀에 끼어 한발 먼저 다녀올 기회도 있었습니다. 몇 해 전 자유칼럼그룹 필진 가족과 함께 다녀왔던 인상이 너무 깊어 길잡이를 자청했기 때문입니다.

부여는 크게 변함이 없이 예전 그대로 우리를 반겼습니다. 다소 한산한 촌 동네 모습 그대로. 망한 나라의 도읍지에 별로 남아 있지 않던 유물 유적이 갑자기 더 생겨날 리도 없겠지요. 그러나 사비성(泗沘城)이 자리했던 부여는 아련히 옛이야기가 남아 있는 곳입니다. 그 이야기를 전해 주는 시비(詩碑), 노래비(-碑)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여를 다시 찾게 만드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부소산성(扶蘇山城) 입구로 올라가 사자루(泗泚樓)에 이르기 전 널찍한 언덕에는 두 기의 시비가 나란히 서서 백제 고토를 찾는 방문객을 맞고 있었습니다. 

‘백제 신민의 눈물 수건을 흠뻑 적셨겠지만/ 당당하고 충성스런 이 몇이나 될까?/ 만약 당시에 낙화암이 없었더라면/ 옛 나라 강산은 쓸쓸한 봄이겠지’ -낙화암(지은이 미상)

‘따뜻한 봄날에 동무들과/ 백제의 옛 서울 찾으니/ 무심한 구름은 오락가락/ 바람은 예대로 부누나 ~~~ 백마강 맑은 물 흐르는 곳/ 낙화암 절벽이 솟았는데/ 꽃처럼 떨어진 궁녀들의/ 길고 긴 원한을 멈췄으리’ -부여(지은이 미상)

지은이가 누구인들 별 상관이 있으리오. 망국의 한을 안고 꽃처럼 스러져 간 백제 여인들에 대한 애상(哀傷)을 누군들 마음속으로 저렇게 읊지 않으리.

낙화암(落花巖) 바로 앞에는 백마강(白馬江)에 몸을 던졌다는 궁녀들을 위로하는 백화정(百花亭)이 세워져 있습니다. 백화정 입구에는 이광수 시인의 ‘낙화암’이라는 노래비가 있었습니다. 

‘사자수 내린 물에 석양이 빗길 제/ 버들꽃 날리는데 낙화암이란다/ 모르는 아이들은 피리만 불건만/ 맘 있는 나그네의 창자를 끊노라/ 낙화암 낙화암 왜 말이 없느냐’

이 시에는 김대현이 곡을 붙여 가곡으로 불리곤 했습니다. 그렇게 부소산성과 백마강에는 시비, 노래비 몇 기로도 짐작하고 남을 만한 백제의 옛이야기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방문객들의 심사를 더욱 처연하게 만들어 주곤 했습니다.

부소산성에 오르면서 저도 몰래 들뜬 기분이 되어 사전답사팀을 안내했습니다. 그런데 웬일일까요. 분명 예전 그 길로 지나왔는데 노래비도 시비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내가 주책없이 떠들다 빠뜨렸는지도 몰라.’ 아무 말도 못 하고 답사를 끝냈습니다. 전체 여행 때 다시 한번 찾아보리라, 다짐하면서.

마침내 80여 명의 대부대가 떠나던 날 단체 카톡방에 주요 일정을 올리면서도 현장에서 반드시 그 노래비, 시비를 찾아 백제 고토에 흐르던 정서를 전해 주리라,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역시 없었습니다. 부여를 읊조리던 시비도, 낙화암을 노래하던 노래비도 온데간데없었습니다. 

여행을 마친 며칠 후 부여군청 문화관광과에 전화를 걸어 까닭을 물어보았습니다. 문화재관리팀 소관이라기에 다시 관리팀 직원을 붙들고 물어보았습니다. 운 나쁘게 전화를 받은 직원이 “역사 유물이 충분치 않은 유적지라 스토리텔링이라도 제대로 구비해야 해서…” 어쩌구 해명하느라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말과 행위가 어긋나는 궁색한 답변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구실을 해오던 주역들을 몰아내고 스토리텔링은 무슨?

답이 궁했는지 그는 마침내 지난해 문화재청에서 나와 현지답사 후 노래비, 시비가 유적지에 적절치 않다며 치우라 했다고 실토했습니다. 애먼 사람이 잠시나마 저 때문에 공연히 고생한 셈입니다. 그러나 부여와 낙화암을 노래한 노래비, 시비가 부소산성, 낙화암에 적절치 않다면 어느 곳이 적절하다는 것인지, 문화재청의 처사도 이해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백마강에는 더 이상 백제의 시가 흐르지 않습니다. 700년 백제 역사의 마지막 120여 년 동안 중흥의 꿈을 실어 나르던 백마강을 내려다보며 또 다른 서글픔에 잠겼습니다. 문득 ‘우리도 지금 문화혁명 중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모택동(毛澤東) 시절 중국은 문화대혁명의 광풍으로 한동안 자랑스러운 전통과 문화를 스스로 파괴하고 말살하는 만행의 소란을 겪었습니다. 그 소용돌이로 수많은 사람들이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 여러 분야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과거 뒤집기와 자기부정에 혹시 문화혁명의 광기가 서린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백마강 유람선에선 오늘도 영탄(詠嘆)조의 유행가 가락이 울려 퍼질 것입니다. 그러나 옛일을 일깨우듯 백마강 위로 아련히 흐르며 그리움처럼 애달픔처럼 길손의 가슴을 파고들던 시구(詩句)들은 찾을 길이 없습니다. 참 아쉬운 일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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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방석순

스포츠서울 편집국 부국장, 경영기획실장, 2002월드컵조직위원회 홍보실장 역임. 올림픽, 월드컵축구 등 국제경기 현장 취재. 스포츠와 미디어, 체육청소년 문제가 주관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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