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속의 일본 여행 [임종건]


태풍 속의 일본 여행 [임종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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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속의 일본 여행

2018.10.30

언론인의 친목단체인 관훈클럽이 매년 주관하는 해외문화탐방단의 일원으로 지난 9월 1일부터 5일까지 일본의 간사이(關西) 지방을 다녀왔습니다. 여행일정을 연락받고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3년 전 후지산(富士山) 등반을 가려다 못 간 일이었습니다.

그해 8월 중순 오랜 준비와 기다림 속에 시즈오카(靜岡)행 비행기를 타러 인천공항에 갔으나 일본의 태풍으로 결항됐다는 소식에 망연자실했던 기억입니다. 태풍이 일본 여행에서 뜻밖의 복병이 될 수 있음을 그때 처음 실감했습니다.  

지난여름은 한반도가 타들어가는 기록적인 무더위로 인해 태풍이라도 와서 더위를 쓸어가기를 바라는 심정들이었습니다. 8월 중순 태풍 솔릭이 한반도로 오기는 했지만 중부와 남부지역을 스치고 지나갔을 뿐 서울을 포함한 중부 이북지역의 무더위는 씻어주지 못했습니다.

출발일이 다가오던 8월 하순 일기예보는 서북태평양 상에서의 태풍 제비의 발생 소식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예상 진로는 한반도 쪽이 아니라 일본 쪽이었으나 출발일인 9월 1일에 세토나이카이(瀬戸内海) 앞에 도착, 일행의 탐방지인 오사카(大阪), 나라(奈良), 교토(京都)를 관통해서 한국의 동해 쪽으로 빠지는 것으로 그려져 있었습니다.

어차피 여행 중에 태풍과 부닥칠 수밖에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면서 3년 전처럼 출국 때나 귀국 때 비행기가 못 뜨는 상황만 없기를 바랐습니다. 일행이 60명이나 되는 단체 여행이라 비행기가 결항하게 된다면 결과가 매우 복잡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탐방단 일행은 여행 나흘째인 9월 4일 오후 3시께 마침내 교토에서 태풍 제비와 맞닥뜨렸습니다. 그보다 1시간 전쯤 태풍은 오사카에 상륙하면서 초속 58.1m의 순간 최대 풍속과, 3.29m의 순간 최고 조위(潮位)로 간사이 공항을 덮쳤습니다.

활주로는 범람한 바닷물에 잠겼고, 태풍으로 떠밀려온 유조선이 오사카 시내와 공항을 잇는 연륙교의 상판을 들이받아 공항을 오가는 교통이 끊겼습니다. 그 뒤로 17일 동안 공항이 폐쇄되는 등 엄청난 물적 피해를 남겼습니다.

서울에 살면서 10년 가까이 태풍을 겪지 않았고, 말로만 듣던 일본의 태풍이라 몸으로 느껴보고 싶은 호기심에서 대피 중이던 쇼핑몰 밖으로 나갔습니다. 폭우를 동반한 태풍 제비가 초속 40m의 강풍으로 도심의 대형빌딩 숲을 후려치는 소리는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그럼에도 일본인들이 무서워한다는 지진, 천둥, 불, 아버지 이 4가지 중에 태풍은 빠져 있습니다. 그것은 태풍이 북서태평양에서 발생해 일본 열도까지 도달하는 데 대개 10일 정도 걸리는 예측 가능한 재난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진도 예측이 가능하지만 태풍만큼은 정밀하진 않고, 더욱이 쓰나미(津波)와 산사태, 화재 등을 동반하기 때문에 태풍보다 피해규모가 큽니다.    

일행이 귀국한 다음 날인 6일 아침 일본과 한국의 TV뉴스는 태풍보다 인명피해가 훨씬 큰 홋카이도(北海道)의 지진과 산사태 소식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태풍 제비가 지진의 원인이 되지는 않았겠지만 산사태만큼은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을 듯했습니다.

태풍 제비가 동해로 빠져나가 북동진하면서 홋카이도에 엄청난 양의 비를 퍼부었고. 그로 인해 산의 땅이 액상(液狀)으로 흐물흐물해진 상황에서 지진이 발생하자 산사태로 이어졌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10월 초에도 24호 태풍 짜미가 일본 영토를 남북으로 관통하며 큰 피해를 냈습니다. 10월 말에는 25호 콩레이가 한국을 거쳐 일본 쪽으로 갔습니다. 이로써 10월 현재 올해 중 발생한 26개의 태풍 중에서 15개가 일본에 영향을 미쳤고, 그중에서 4개가 일본 열도를 동서 또는 남북으로 관통했습니다.

태풍과 지진은 일본이 상시적으로 겪는 재난입니다. 그런 자연재난이 일본의 문화와 민족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하는 생각을 해오던 터에 현지에서 태풍 제비를 체험하고 나니 분명 영향이 있겠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재난에 대비하는 기술에서 일본을 따를 나라는 없습니다. 일본인들이 고안한 여러 재난대피의 지혜 중의 하나가 벗은 신발이나, 주차장의 차들을 예외 없이 출구 쪽을 향하게 정돈하는 것입니다. 재빠른 대피를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거리에 음료수 자판기가 일정 거리마다 설치된 것도 긴급사태 시의 음료 공급목적을 겸한 것이라고 합니다.

간사이 지역의 들은 대부분 논이었습니다만, 여러 번 태풍에 시달린 지역답지 않게 들판에 벼가 넘어진 논을 볼 수 없었습니다. 바람에 강한 벼를 육종 개발한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채소나 과일에도 해당될 것입니다. 태풍이 한 번만 지나가도 온갖 농작물의 흉작 파동으로 홍역을 치르는 게 한국의 실정입니다.

재난이 일본인들의 정신세계에 미친 영향으로 일본의 침략근성을 들기도 합니다. ‘재난 없는 땅’에 대한 변태적 욕구라는 것입니다. 셋부쿠(切腹)나 임진왜란 시의 ‘귀무덤’ 같은 잔혹성도 잠재된 불안감의 변형된 표출이 아닐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아울러 일본이 존재함으로써 한반도가 안전해지는 부분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기회도 되었습니다. 모든 태풍은 일본을 관통해 동해로 빠지더라도 예외 없이 한반도 반대쪽인 북동쪽으로 갑니다. 일본이 없다면 한반도는 일년내내 태풍에 시달려야 했을 지도 모릅니다. 큰 지진도 대개는 일본 본토나 동쪽 바다에서 납니다. 일본이 없다면 지진대는 한반도에 더 근접해 있을 것이고, 쓰나미는 우리의 동남해안을 직격할 것입니다.

새삼 우리가 자연재난이 덜한 금수강산을 물려받은 행운에 고마움을 느끼며, 이 땅을 잘 가꾸고 지키는 것이 우리의 사명임을 깨닫습니다.

*태풍 제비의 피해 상황을 보도한 9월 5일자 일본 아사히신문 1면. 침수된 간사이공항과 유조선과 부딪쳐 상판이 파손된 연륙교 사진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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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임종건

한국일보와 자매지 서울경제신문 편집국의 여러 부에서 기자와 부장을 거친 뒤 서울경제신문 논설위원 및 사장을 끝으로 퇴임했으며 현재는 일요신문 일요칼럼, 논객닷컴 등의 고정필진으로 활동 중입니다. 한남대 교수,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및 감사를 역임했습니다. 필명인 드라이펜(DRY PEN)처럼 사실에 바탕한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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