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비닛 문건, 실수로 남겼을리 없다… 누군가 갖다 바친거면 몰라도"


캐비닛 문건, 실수로 남겼을리 없다… 누군가 갖다 바친거면 몰라도"

박근혜 정부
마지막 민정수석 조대환

    조대환(62) 변호사가 신임 민정수석으로 청와대에 들어간 것은 국회가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안을 가결한 다음 날이었다. 주위에선 기를 쓰고 말렸다. 남은 인생길이 험로가 된다는 것이었다. 조 전 수석을 만난 것은 그가 아직도 박근혜 정부에서 일한 것을 숨기지 않는 몇 안 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쉽지 않은 결단이었을 것 같습니다.

"전임인 최재경 민정수석에게 직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들었습니다. 검찰이 현직 대통령을 피의자로 입건하는 초유의 일이 있었기 때문에 최 수석이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고 해요. 솔직히 승낙하겠다는 말은 바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왜 생각을 바꿨나요.

"돕겠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해가 가면서도 한편으론 권력에 신의는 없느냐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서로 친박이라고 얘기하던 시절도 있지 않았습니까. 어려울 때 저를 찾는데 도망갈 수도 없었지요."

―청와대 분위기는 어땠나요.

"원래 이렇게 조용한 곳인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적막하다고 할까요. 출입 통제가 삼엄하고 식사도 나가지 않고 안에서 해결하니까. 또 다른 격리된 사회, 군대 같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박 전 대통령과는 2007년 만났지요.

"이명박 전 대통령과 당내 경선할 때였습니다. 법률 보좌 역할을 했습니다. 박 전 대통령의 싱크탱크 국가미래연구원 발기인 역할도 했습니다. 저는 한결같은 모습만 봐 왔는데, 세상의 눈은 다른가 봅니다."

―이면을 몰랐던 것 아닌가요.

"제 나이쯤 되는 사람들에게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로 각인돼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접하면 정치인 박근혜가 또렷이 느껴집니다. 우왕좌왕 없이 가는 길도 뚜렷하고요. 지금은 허망한 얘기라고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만."



캐비닛 속 문건

곽상도, 홍경식, 김영한, 우병우, 최재경. 그의 전임 민정수석은 모두 특수통, 공안통 출신 검사. 조 전 수석도 특수부에서 이름을 날린 검사 출신이다. 이들은 모두 '꼼꼼하고 깐깐한' 일 처리로 유명했다. 박 전 대통령도 이런 점을 높게 샀다.

그래서일까. 충격은 컸다. 지난해 7월 문재인 정부는 민정비서관실에서 박근혜 정부와 관련된 문건들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문건에는 삼성의 경영권 승계 지원, 문화 예술계 블랙리스트 집행 방안 등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그런 식으로 문건이 발견된 것 자체가 이례적이었다.

"기가 막히지요. 공직자가 떠날 때 인수인계와 폐기는 당연한 일입니다. 직원 캐비닛과 책상을 제가 하나하나 열어본 것은 아닙니다만 여러 번에 걸쳐 확인하라고 얘기했습니다. 캐비닛에 문서가 남아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누가 가져다 놨다는 얘기로 들립니다.

"박근혜 정부 관계자가 현 정부에 갖다 바친 것 아닌가 싶습니다. 저로서는 그렇게밖에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문서 내용의 불법성이 문제 아닌가요.

"문서를 그런 식으로 이용한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대통령 기록물 관리법의 입법 취지는 상호 존중입니다. 앞 정권의 일을 다 비우고 다음 정권은 백지에서 시작하라는 뜻입니다. 백 보 양보해 캐비닛에서 문서가 발견됐다고 해도, 그대로 청와대 기록물로 이관해야 맞습니다. 그런데 이를 연구 검토까지 한 뒤, 언론에 공개하고 수사와 재판에 제출했습니다. 범법이지요. 민정수석실 직원이 실수로 문건을 남겼을 리는 없습니다."



12박 13일 도보 낙향(落鄕)

지난해 5월 청와대를 나온 조 전 수석은 곧바로 낙향했다. 12박 13일을 걸어 고향인 경북 청송까지 갔다. 옛 선비들이 과거시험을 볼 때 오갔던 문경새재 등 옛 영남대로 길을 따랐다.

―하루 8시간 정도를 걸었다고요.

"걸어서 힘든 게 아니라 민정수석으로 청와대에 들어갔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회한과 반성, 울분 같은 것이 표출돼 힘들더군요."

―예견된 일 아니었나요.

"생각보다 심각했습니다. 공무원들이 아예 일을 하지 않습니다. 민정수석은 민심 정보를 얻어야 하는 자리입니다. 정권이 흔들릴 때 더욱 중요한 일이지요. 그런데 국정원, 검찰, 경찰, 감사원 등 사정기관에서 민생 정보가 안 올라와요. 공무원들이 박근혜 정부를 '지는 해'라 보고 그러는 것을 아니까 더 답답했습니다. 나중에 그 사람들이 새 정부에서 자리를 꿰차는 것을 봤습니다. 그게 무슨 공무원입니까."

―정부 말기에 으레 있는 일 아닌가요.

"정도가 달랐습니다. 공무원들이 임명, 지명 절차까지 멈춰버렸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때는 그렇지 않았어요. 노 전 대통령 때는 탄핵에 대한 반박 논리나 방어를 법무부에서 마련했어요. 나중에 지장이 있을 테니 그랬겠지요."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이 있었는데 조치가 없었나요.

"등을 돌리고 복지부동한 공무원은 귀신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최근 박 전 대통령에게 징역 25년이 선고됐습니다.

"수사 내용뿐 아니라 영장, 공소장이 온 천지에 돌아다니는 경우가 어디 있나요. 법조계 생활 30년 넘게 했는데, 사람을 죽이지 않고 그런 선고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세월호 특조위 업무를 방해했다는 혐의로 최근 검찰 조사를 받았다. 기소는 피했지만 시민 단체 등에서 적폐 인물로 낙인이 찍혀 있다. 험로를 마주한다는 예상은 비껴가지 않았다.
김아사 기자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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