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경궁과 수원성


[끝나지 않은 정조의 건축]

혜경궁과 수원성


김관수 

여유당건축사사무소㈜ 문화재실측설계기술자


  1789년 수원 신읍치를 현재 위치로 정할 때는 성의 축조를 고려하지 않았고 신읍을 조성한 후에는 여러 신료들이 축성을 건의하나 정치·경제적 이유로 정조는 거절한다. 그런데 정조가 갑자기 마음을 바꿔 축성 이야기를 다시 꺼내고 추진하게 한다. 이유는 평생 아들을 위해 살아온 어머니께 감사한 마음에서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세손과 세자시절을 어렵게 보내고 등극과 정치도 쉬운 것만은 아니었지만, 모든 것을 이겨내고 군왕으로서 늠름하게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큰 효도였을 것이다. 옛날 아버지 사도세자는 할머니 영빈이씨의 환갑에 후궁임에도 불구하고 중전의 예우로 행차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정조에게도 같은 상황이 재현되고 있었다. 아버지는 세자시절 어렵게 환갑잔치를 진행했고 본인은 군왕으로 정식 왕비가 아닌 혜경궁의 환갑을 잘 치러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정순왕후가 있는 궁궐에서 혜경궁의 환갑연은 원만하게 치를 수는 없었다.


정조는 고심 끝에 환갑잔치를 궁궐 밖에서 열기로 하고 장소는 아버지가 있는 수원으로 결정한다. 이 생각을 한 시점은 1792년 말로 환갑은 1795년 8월이니 남은 기간은 2년8개월 정도였다. 하지만 왕의 행차는 보통 백성들의 일이 없는 한 겨울 즉 농한기에 진행하는 것이 오래된 관습이었다. 이에 따라 혜경궁의 환갑도 앞 당겨 겨울에 할 수밖에 없어 준비기간은 더 짧아진 2년 정도가 남게 된다. 정조가 수원을 결정하고 가장 먼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혜경궁이 한겨울에 편하게 머물 수 있고 왕비로서 위계를 갖는 공간이었다. 기존의 수원행궁은 일반 관아와 같은 형태로 이를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행궁 공사는 1791년 5월에 마무리되고 정조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시점이 1792년 겨울이니 일년 반이 지난 시점이 된다. 아무리 왕이지만 준공된 지 얼마 되지 않은데 새롭게 재건축을 하는 것은 부담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유수부로 승격시켜 행궁 관아의 역할 변화를 유도하여 자연스럽게 혜경궁의 위한 공간을 조성할 계획으로 하였다.


혜경궁 홍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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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업은 빠르게 진행되어 1793년 1월 수원에 방문하여 수원도호부를 수원유수부로 승격시키고 초대유수 체재공(당시 종1품)을 임명한다. 지방관의 최고직급은 종2품으로 관찰사와 유수가 있는데 여기서는 특별한 조치였다. 정조는 여기서 노론의 탄핵을 받아 유배에 있는 체재공의 우회복권과 혜경궁의 공간 확보라는 두 가지의 문제를 해결한다. 수원유수의 집무처를 상아(上衙)라 하여 행궁을 사용하고 판관의 집무처를 이아(貳衙)라고 하여 별도로 신축을 하고 행궁에 혜경궁의 공간을 만들어 간다.


수원의 축성공사를 결심한 것은 1792년 말경으로 정약용을 비밀리에 불러 기본설계를 지시하였으니 이는 유수부의 승격보다 먼저 일이다. 하지만 본격적인 축성공사는 일년 뒤인 1794년 1월에 시작된다. 정약용에게 일을 지시하면서 공사가 시작되었으면 혜경궁의 환갑에 맞추어 완성도 가능했을 것인데 일년이나 늦게 시작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처음 축성계획 시기에 예정공사기간으로 10년을 예상하고 을묘년 행사(환갑연)와 결부시키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시간이 일 년이나 지나서 혜경궁의 동선에 맞춰 북문과 남문 및 그 주변만 공사를 진행하고 나머지는 환갑잔치가 끝나고 해도 무방하다는 것을 생각을 하면서 빠르게 추진된다.


화성을 대표하는 화서문 ⓒ 김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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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혜경궁이 수원을 방문한 1795년 윤2월을 기준으로 읍치공사는 완성되지만, 축성공사는 1차부분만 완성된다. 북성(北城)부분은 동쪽 방화수류정에서 서쪽 북포루까지 공사가 진행되고 화서문과 서북공심돈은 제외되었다. 남성(南城)부분은 팔달문과 동서적대만 공사가 되고 팔달문 옹성은 제외되었다. 그리고 시선에 들어오지 않는 앞, 뒷산에 있는 성곽과 시설들도 제외되고 서장대(西將臺)는 화성의 어디에서도 보이는 곳이라 이 시설만은 건립되었다.


그동안은 수원화성이 사도세자를 위해서 만든 결과라고 보았지만 이번 고찰에서는 아버지보다는 어머니 혜경궁을 위한 점이 더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경기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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