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천 530GP 김일병 총기 난사사건, 검찰 재수사"


[국민이 알 권리]


유가족 

“노무현 정권이 북한군 공격을 총기사건으로 조작·은폐” 주장

대법원 무죄선고 불구, 군사고등법원 유죄선고..."있을 수 없는 일"

하극상임에도 국가 유공자 표창


    비무장지대 초소 530GP 내무반에서 일어난, 8명의 사망자를 낳았던 ‘김동민 일병 총기 난사 사건’에 대해 사건 발생 12년이 지난 시점에서 검찰이 재수사에 나서,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전방 530P 사건의 8명의 사망 병사들. 출처 = 유튜브 동영상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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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족들의 주장입니다 (19금) -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nbrd/bbs/view.html?b_bbs_id=10038&num=7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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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발생 7년 후 온라인에서 유포돼 논란을 일으켰던 동영상도 이번 검찰 재조사로 다시금 재조명 되고 있다


일부 유족들은 이들 사망자가 김 일병이 아닌 북한군의 공격에 의해 발생했는데, 노무현 정권이 김일병의 소행인 것처럼 조작 은폐하려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출처 동아일보


이 기사에서는 보다 자세한 내막을 들여다 보며, 유족측의 주장의 근거를 심층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지난 2005년 6월 19일 새벽 경기 연천군 비무장지대 내 최전방 530 경계초소(GP)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했다.


부대원인 김동민 일병이 내무반에 수류탄 1발을 던지고 기관총 44발을 난사해 장병 8명이 숨지고 4명이 부상을 입었다.

군부대에서 일어난 총기 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이었다.


국방부는 “내성적인 김 일병이 선임병들의 괴롭힘에 시달리다 범행을 저질렀다”고 결론 내렸고, 사형이 확정된 김 일병은 국군교도소에 12년째 수감 중이다.


하지만 일부 유족들과 시민단체는 북한군의 소행을 남북관계를 위해 조작·은폐했다며 수년 간 국방부에 민원을 제기했고, 시신을 검안했던 군의관을 검찰에 고발했다.


사망한 장병들의 상처가 수류탄 파편이나 소총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없고, 사고 당시 최초 보고에는 ‘미상의 화기 9발 피격’이라고 돼 있다는 게 이들 주장의 근거다.


유가족들은 “군 수사발표는 조작이며 가상의 시나리오에 불과하고, 노무현 정권 시기 적 도발 사건을 아군의 자작극으로 둔갑시키고 가짜범인인 김동민 일병의 위증을 내세운 사건”이라며 “고인들을 친북 정책의 희생양으로 만든 천인공노할, 극악무도한 국기문란사건”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유족들은 이 같은 주장을 조선일보와 문화일보에 광고로 실으며 생존 장병들에게 진실을 규명해 달라고 호소했으며, 2012년 5월16일에는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동영상이 유포돼 재조명되기도 했다.


50분 분량의 이 영상에는 사건 직후 숨진 병사들의 시신이 침낭과 담요로 가려져 있는 모습과 김 일병이 헌병에 체포돼 묶여 있는 모습 등이 담겨 있다.


<연천 530GP사건 10대 의혹>이라는 동영상에서 한 생존 병사는 “작전 중 사고라고 볼 수 있다”고도 말하고 있다. 이 동영상은 10대 의혹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있다.


1. 사건현장이 조작됐다.

수류탄이 터진 530GP 내무반 사진에서, 수류탄은 폭발시 40%의 파편이 위로 향하는데, 내무반 천장의 석고보드가 전혀 깨지지 않았다는 것. 수류탄이 터지면 천장이 남아날 수 없다. 또 1m도 떨어지지 않은 관물대 역시 파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장병들의 시신에서 수류탄 파편이 아니라 이상한 사다리꼴 파편이 나왔고, 또 수류탄이 터졌는데 여러 명이 다치지 않았다.


수류탄이 터졌는데도 파편 흔적이 없는 천장의 모습 / 출처 = 유튜브 동영상 캡처


수류탄을 터뜨리고 총기를 난사했다고 하는데, 관물대는 수류탄 파편이나 총격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이 깨끗하다 / 출처 = 유튜브 동영상 캡처


또 김 일병이 총기를 난사했다고 하는데, 총탄의 흔적 역시 보이지 않는다.


김 일병이 사용했다는 탄창의 증거 사진에서 최초 감정 사진과 현장검증VTR 사진에서 탄창의 위치가 다르다.



탄창의 위치가 최초 감정사진과 현장검증 VCR 사진에서 다른 모습이다 / 출처 = 유튜브 동영상 캡처 


또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 결과, 탄창과 수류탄 손잡이에서 김 일병의 지문이 채취되지 않았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 결과, 수류탄 손잡이와 총에서 김 일병의 지문이 채취되지않았다 / 출처 = 유튜브 동영상 캡처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 결과, 수류탄 손잡이와 총에서 김 일병의 지문이 채취되지않았다 / 출처 = 유튜브 동영상 캡처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 결과, 수류탄 손잡이와 총에서 김 일병의 지문이 채취되지않았다 / 출처 = 유튜브 동영상 캡처


김종명 중위가 있던 체력단련장에서도, 최초 사진에서는 신발이 바닥에 있었는데, 현장검증VTR 사진에서는 김 중위가 신발을 신고 있다. (동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건 현장을 조작했다는 의미다.


야간 취침 중에 일어난 사건이었다면 평상복 차림으로 변을 당했을텐데, 관물대 속의 멀쩡한 전투복까지 모두 소각했다며 유족들에게 유품을 하나도 돌려주지 않은 부분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보통 사망자의 유품은 유가족들에게 돌려주는 것이 관례적이다.


범행 7분 동안 범인인 김 일병의 범행에 대한 목격자가 한 명도 없고 범인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도 없다.


아울러 당시 GP 옥상에도 포격이 있었는데, 호화 휴게실을 설치해 이를 은폐했다. 적과 맞서고 있는 GP 옥상에 어떻게 호화 휴게실을 설치하는가? 대한민국의 다른 GP에는 없는 일이다.


2. 시신을 이동 배치했다.

조 모 상병이 내무반이 아닌 취사장에서 숨진 것과 사망한 소대장이 새벽 2시에 체력단련장에 있었던 것도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지적이다. 시신을 이동 배치했다고 볼 수 있는 정황이다.


한 생존 병사 어머니는 동영상에서 “그 상황에서 (시신) 배치를 수도 없이 시키더랍니다. 그래서 그랬었냐?”하자 “지가(자기가) 그랬다고 정신이 한개도(하나도) 없대요”라고 말하고 있다.


차단작전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과정에서 열화탄이 막 쏟아져서 장병들이 죽고 난리가 났는데, 시신을 배치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받고 시신을 배치했다는 것.


동영상은 생존 병사의 진술에 따르면, 부상자 후송 시까지 복귀하지 못한 사병(조상병)이 있었고 생명이 위급한 부상자의 후송이 지연돼 사망자가 더 늘었다고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피격사건으로 인한 부상병들을 6시간이 지나도록 긴급 후송조치 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건을 조작 은폐하기 위해 부상자들을 방치해 과다출혈로 병사들이 사망하게 했다. 이 주장이 사실일 경우, 정부와 군 당국이 병사들을 죽음으로 내몬 살인행위를 한 것일 수 있는 부분이다.


피를 닦고 시신을 배치했다는 생존 병사의 또 다른 진술도 있다.


3. 진술서가 조작됐다.

생존병사 김 상병의 1차 진술서와 2차 진술서의 내용은 비슷하지만 필체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


생존장병 진술서의 필체가 다르다 / 출처 = 유튜브 동영상 캡처


4. 총상도, 수류탄 파편상도 아니다.

사망장병의 등과 머리 부분에 대한 X레이 사진에서, 먼저 일반적인 수류탄 파편상은 일정한 크기의 작은 조각들이 퍼져 있는 반면 50GP 사망 장병에게서 발견된 파편은 크기가 일정치 않고 수류탄 파편과는 전혀 다른 모양이다.


일반적인 수류탄 파편상은 일정한 크기의 작은 조각들이 퍼져 있는 반면 50GP 사망 장병에게서 발견된 파편은 크기가 일정치 않고 수류탄 파편과는 전혀 다른 모양이다. / 출처 = 유튜브 동영상 캡처


또 시선 검안 과정에서, 시신에 맹관총창(탄두가 신체 내에 남게 되는 경우)이 발견됐지만 X레이 사진에서는 탄두가 보이지 않는다.


다른 사망 장병에게서도 총상이나 수류탄 파편상이라고 보기 어려운 상처가 남아 있다. 이 보다 더 큰 ‘큰 파편’에 의해 생긴 상처라는 것. 수류탄 파편을 몸에 다 맞았다고 한 장병의 몸에 생긴 상처도 수류탄 파편 상으로는 보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동영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또 김 일병은 체력단련장의 김 중위에게 1m 이상 떨어진 곳에서 총기를 난사했다고 말했는데, 김 중위의 사체에서는 30~60cm 이내에서 총상을 당했을 때 발견되는 화약 감입으로 추정되는 흔적이 발견됐다. (화약감입은 화약잔사에 의한 변화로 화약의 잔재가 묻어나는 현상이다.) 김 일병의 진술이 허위 진술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허위 진술을 강요당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김 중위에게 일반적인 총상이라고 보기 힘든 상처가 남아 있다. (동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김 일병은 체력단련장의 김 중위에게 1m 이상 떨어진 곳에서 총기를 난사했다고 말했는데, 김 중위의 사체에서는 30~60cm 이내에서 총상을 당했을 때 발견되는 화약 감입으로 추정되는 흔적이 발견됐다. / 출처 = 유튜브 동영상 캡처


병사들의 시신 대부분에 불에 그을린 흔적이 남아 있는데, 이것은 총상이나 수류탄 파편상이 아닌 월남전에서 많이 사용된 열화탄에 의한 사망 흔적이다.


다른 사망 장병의 경우에도 총상에 의한 사망이라고 하지만, 상처의 크기가 크고 형태도 서로 다르다.


그리고 차단작전을 나갔으면 당연히 방탄복을 착용하게 되어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사망자들의 가슴에 상처가 없고 머리와 다리 부위 등에 상처가 있다. 평상복을 입고 자던 중이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부상자 4명은 총상이 전혀 없다.


5. 2005년 6월 19일 군은 긴박한 대치 상황이었다.

장교들의 진술서에는 교전이 일어났다, 530GP에서 미상화기로 9발 공격당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장교들의 진술서에는 교전이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 출처 = 유튜브 동영상 캡처


장교들의 진술서에는 교전이 일어났다, 530GP에서 미상화기로 9발 공격당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 출처 = 유튜브 동영상 캡처


모든 상황을 기록하는 상황일지에는 새벽 2시 36분경 530GP에 북한군이 들어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새벽 2시 39분 GP/GOP 전원 투입 지시, 차단부대 출동 지시 전 화포 대기 지시를 내렸다는 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모든 상황을 기록하는 상황일지에는 새벽 2시 36분경 530GP에 북한군이 들어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 출처 = 유튜브 동영상 캡처



상황일지에는 새벽 2시 39분 GP/GOP 전원 투입 지시, 차단부대 출동 지시 전 화포 대기 지시를 내렸다는 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부대 상황일지에 사망자가 5명이라는 기록도 포함되어 있다.


부대 상황일지에 사망자가 5명이라는 내용 / 출처 = 유튜브 동영상 캡처


6. 차단작전 중 사고였다.

유가족과 생존 병사의 면담 내용에 따르면, 생존 병사는 유가족에게 작전 중 사고라고 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월간 군사세계 2007년 5월호는 <530GP 사고, 작전중 사고였다?>는 기사에서 차단작전조에 투입되었던 장병들의 이름을 입수해 밝혔는데, 사망자 중 김종명 차유철 김인창, 조정웅, 이태련, 전영철이 그들이다.



530 GP 사고에 대해 다룬 월간 군사세계 / 출처 = 유튜브 동영상 캡처


월간 군사세계 2007년 5월호는 <530GP 사고, 작전중 사고였다?>는 기사에서 차단작전조에 투입되었던 장병들의 이름을 입수해 밝혔는데, 사망자 중 김종명 차유철 김인창, 조정웅, 이태련, 전영철이 그들이다. / 출처 = 유튜브 동영상 캡처


수사 보고서에 따르면, 530GP의 소총은 K-1소총 14정, K-2소총 14정 등 총 28정이다.


수사 보고서에 따르면, 530GP의 소총은 K-1소총 14정, K-2소총 14정 등 총 28정이다. / 출처 = 유튜브 동영상 캡처


하지만 현장검증 VTR에서는 K-1소총과 K-2 소총이 총 20정 뿐으로, 8정이 없다.


하지만 현장검증 VTR에서는 K-1소총과 K-2 소총이 총 20정 뿐으로, 8정이 없다. / 출처 = 유튜브 동영상 캡처


사고 후 반납 총기가 전체적으로 22정이 부족했고, 차단작전 시에만 휴대하는 K3총(기관총)이 하나도 없었는데, 국방부는 있었다고 거짓 발표했다. 차단 작전하러 무기를 들고 나갔는데, 제대로 수습하고 대충 정리하다 총기수가 틀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는 지적이다.


한 장병이 사망 장병의 홈페이지에 남긴 글에 따르면, 6월 19일 새벽에 자고 있는데 GP에서 총격전이 일어났고, 사고 후에 폐기한다고 그곳에 가지고 내려온 총과 방독면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총이 피로 물들어, 사고 조작과 은폐를 위해 숨겼다고 추정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한 동료 병사가 올린 글로, GP에서 총격전이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총과 방독면이 피로 물들었다고 적었다. / 출처 = 유튜브 동영상 캡처


한 동료 병사가 올린 글로, 총과 방독면이 피로 물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 출처 = 유튜브 동영상 캡처


7. 이해하기 힘든 정부와 국방부의 포상

이 밖에도 사건 후에 정부와 국방부의 모습도 이해하기 어렵다.


24명의 생존 소대원 중 거부자 3명을 제외한 전원을 조기전역 및 국가유공자로 지정했으며, 군복무규정을 위반해 김 일병에게 폭력과 가혹행위를 가한 7명의 귀책사병까지도 군법 처벌은 커녕 조기전역과 6-7급 국가유공자 특혜를 받았다.


장교를 포함해 8명의 장병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을 입는 엄청난 사건이었지만 실형을 받은 사병이나 장교가 1명도 없다. 당시 중대장을 비롯한 사단장까지도 중징계는 고사하고 보직이 승승장구했다.


당시 김장수 육군참모총장도 이후 국회의원, 청와대 안보실장 등으로 출세가도를 달렸다.


국방부 발표대로라면, 가혹행위로 인해 엄청난 총기난사 사고가 발생했는데, 오히려 이러한 특혜를 받는 것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다.


또 사고를 낸 김 일병은 군 복무기간이 끝나면 군 교도소에서 일반교도소로 자리를 옮겨야 하는데, 아직도 군 교도소에 갇혀 있다.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사형 집행도 하지 않고 있다.


특히 대법원에서는 김 일병 총기 난사 사건에 대해 원심 사형을 파기하고 고등군사법원으로 환송했다. 상관살해 및 상관살해 미수 부분을 파기하라는 것으로, 사실상 김 일병이 무죄라는 선고였다. 다른 말로, 이 사건이 김 일병의 하극상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망한 이들은 모두 김 일병의 상관들이었다.) 그러나 고등군사법원은 대법원의 파기 환송에 대해 그대로 사형을 선고했고(대법원의 판결을 안 받아들이는 경우는 없고,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사실상 대법원에 의해 무죄 선고를 받은 김 일병은 상고를 포기했다.


유가족은 이 사건이 2005년 6월 18일 22시경 상병급 포함 14명이 작전에 참가 중 2005년 6월 19일 새벽 1시 이전에 북한군의 이상화기 9발 피격으로 인해 발생된 것이며, 당시 폭발음 간격은 3~4초였고 약 1~2분 이내의 짧은 시간에 상황이 종료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고 조정웅 상병 아버지인 조두하씨는 지난 25일 채널A에 “유사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게 저희의 바람이고, 은폐된 내용들이나 조작된 것들이 밝혀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검찰은 이달 초부터 유족들과 생존 장병들을 불러 재조사에 나선 가운데, 유족들의 의혹이 풀릴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내무반 보수공사를 사고가 난 다음날 한 부분, 사고난 부대 지위계통의 특진과 위로금, 일부 군인의 조작된 특진과 위로금에 대한 거부, 김 일병 독방에 CCTV가 없는 이유, 많은 전우를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사형에 처하지 않고 13년간이나 감금하고 있는 이유, 노무현 전 대통령이 김정일과의 정상회담을 강행한 의도 등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한편, 송영인(ROTC 5기·국정원 출신) 530GP진상규명촉구위원회 회장은 지난 28일 진정방송에 출연 “대한민국은 물론 5천년 역사에서 이보다 더한 국기문란 사건은 없었다”고 울분을 토로했다.


또 이번 사건이 검찰에 의해 재수사가 이뤄질 때까지 과정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소개했다.


그는 “지난 번 국방부에 진정서를 냈을 때,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것이 공식답변이었다”면서 “전사자를 하극상으로 만든 이 국기문란 사건에 대해 공소시효가 있을 수 있느냐고 문제를 제기했는데, 국방부 내에 있는 한 ROTC 출신 장교가 전화를 해서 똑같은 진정서를 아무리 보내봐야 안 되니 군 법무관실로 보내라고 조언했다”고 말했다.


이어 “법무관실에서 이것이 문제가 있다고 판단해서 중앙지검으로, 검찰로 넘겼고, 검찰이 사자 명예훼손은 공소시효가 5년인데 지나서 조사를 할 수 없다고 문서를 보내왔다”면서 “수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은 상대편에서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해줘야 하는 것이었고, 광고를 내서 국방부 장관과 당시의 민정수석이었던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를 비판하는 글을 여러 신문에 광고로 냈는데 답변이 없었다”고 말했다.


결국 유가족은 이 사건에 대해 허위검안을 한 이후 군의관 대위에서 서울의대 법의학 교수로 특채된 유성호 교수에 대해 비판하는 광고를 냈고, 그러나 서울대에서 계속 반응이 없었지만, 검찰에까지 고발장을 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검찰에서는 외부 발표 없이 내부적으로 재수사에 착수했다. (군의관이 서울대 교수로 채용되는 것은, 아주 특별한,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송 회장은 이어 지난 18일 TV 조선에 박 모 기자가 530GP 진상에 대해 관심을 보이며 찾아왔고, 이어 다른 신문사에서 또 전화가 왔고, 세 번째 채널A의 여기자가 와서 이야기를 했는데 결국 채널A를 통해 보도가 됐다고 소개했다. 채널A가 의도를 가지고 터뜨렸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송 회장은 검찰이 이번에 재수사에 나선 것은 정치적 목적이 있을 것으로도 예상했다. 정치 검찰이 문재인의 아킬레스건으로 파헤쳐놨다가 나중에 이용하려는 것이 아니냐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하고 있다고도 솔직하게 말했다. 문재인의 안보관에 대한 검증 차원에서 검찰이 소신 있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도 했다.


송 회장은 이 사건에 만약에 조작이라면, 조작한 이유가 무엇이겠느냐는 정미홍 진정방송 대표의 질문에 “2005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김정일과 정상회담을 못해서 안달이 났다”면서 “정상회담을 위해 당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을 평양에 보내서 국민들과의 합의 없이 쌀 50만톤과 전기 200만kw를 주기로 했었다. 그리고 나서 정상회담을 하려고 했는데, 김정일이 대한민국의 안보 상황을 시험해보기 위해 무장한 인민군 5명을 내려보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명이 생포되면서 차단작전이 시작이 됐고, 넘어가지도 못하고 다시 오지도 못하게 작전 ‘진돗개 둘’을 수행하다 일이 터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국방부는 처음에는 차단작전을 안 했다고 당시 거짓말을 했는데, 생존자들은 모두 작전을 했다고 했고, 국방부도 1년 반 후에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불러서 증언을 하는 가운데 차단작전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520과 531은 차단작전을 했는데, 530은 차단작전을 안 했다고 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비상 사태에서 530만 나홀로 차단작전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지적이다.


송 회장은 또 “하극상 사건인데, 사망한 군인들이 대전 현충원에 모셔져 있고, 군의 예산이 없어서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 하사관 이상이 모두 돈을 갹출해서 유족들에게 위로금을 주고, 합참과 국방부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돈을 걷는 예외적인 일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하극상인데, 왜 장례식에서 육군장에 준하는 영결식을 거행했는가? 장례식에 그 때 박근혜 전 새누리당 대표를 비롯해 별만 100개 이상이 떴는데, 하극상 사건에 대해 왜 그렇게 많은 변들이 뜨는가?”라고 반문하며, 당시 정부와 군도 이 사건이 하극상이 아닌 북한군 소행인 것을 알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또 모든 사망한 병사들을 1계급 추서했다. 사연평해전 전사자들에게도 이 정도의 보상은 주어지지 않았다.

By: Jonathan Nohon: April 01, 2017 워싱턴 프론티어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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