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영희 씨 [방석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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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영희 씨

2016.02.12


그녀는 어느덧 53세의 중년 아줌마가 되어 있었습니다. 예쁘게 단장한 얼굴, 해맑은 모습에 유머 감각이 넘쳐났습니다. 그러나 2주 전 아침 방송에 그녀가 나타나던 바로 그 순간엔 제 가슴 속에서 무언가 쿵 하고 떨어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저렇게 잘 살아 있었구나!’ 한참 지나서야 비로소 안도하는 마음으로 그녀의 재담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습니다.

“선수 시절 별명이…?”
“네, 코끼리였지요.”
“1984년 LA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땄었지요?”
“네.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그거 기억 못하면 간첩인데.”
“키가 정말 크긴 크군요? 얼마나 되죠?”
“2미터 5센티밖에 안 돼요, 별로 크지 않지요. 그래도 방송 끝나면 병원에 가 보세요. 올려다보느라 목에 디스크가 올지도 모르니.”
“농구 선수 때 보긴 했지만 이렇게 유머감각을 가지신 줄은 몰랐어요.”
“즐거운 마음으로 사니까 저에게도 행복이 다가오는 것 같네요.”
 
솔직히 저는 오랫동안 그녀를 잊고 살았습니다. 간간이 그녀가 여전히 성장을 멈추지 않는 육신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도 같습니다. 그래서 돌연한 그녀의 출현 자체가 상당한 충격이었습니다. 무언가 마음에 큰 빚을 진 사람과 맞닥뜨린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김영희. 그는 한때 한국여자농구를 대표하던 선수였습니다. 숭의여고를 졸업하고 한국화장품에 입단, 성인무대를 휩쓸던 스타였습니다. 1983년 여자농구대잔치에서 최우수선수상, 리바운드상, 득점상, 자유투상에 인기상까지 싹쓸이했습니다. 18세에 국가대표로 뽑혀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1984년 LA 올림픽,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잇달아 은메달을 따내는 데 앞장섰습니다. 너무나 큰 키와 골격 때문에 외양으로는 크게 호감을 얻지 못했지만 팀이 가장 어려울 때 가장 믿음직한 버팀목이 되어 주던 선수였습니다.
 
그러던 그녀가 서울 올림픽을 한 해 앞둔 1987년 훈련 도중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심한 두통에 눈이 어두워지고 한쪽 팔이 마비되는 괴증상 때문이었습니다. 진단 결과는 놀랍게도 뇌종양. 장시간의 수술에서도 종양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해 이후 혹독한 고통 속에 방사선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더욱 가혹했던 것은 더 이상 운동을 할 수 없다는 의료진의 선언이었습니다. 그녀는 마치 사형을 선고받은 기분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때 이후 농구 스타 김영희의 이름은 서서히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 갔습니다. 아니, 그녀 스스로 두문불출, 세상과 등져 살았다고 합니다. 어쩌다 문밖으로 나왔다가는 세상 사람들이 함부로 던지는 말에 더욱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20여 년 집안에 파묻혀 사는 동안 오로지 어머니만이 그의 위로가 되어 주었습니다.
 
농구를 잃은 그녀의 생은 외롭고 비참했습니다. 유일한 의지였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듬해 지병을 앓던 아버지마저 여읜 후 그녀는 스스로 생을 마감해야겠다는 모진 마음을 먹기도 했답니다. 식음을 전폐해 한때 130kg 나가던 몸이 70kg으로 빠져 뼈만 남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녀의 생명을 구한 것은 남동생 부부였습니다. “누나마저 떠나면 난 외로워서 어떻게 살아?” 하며 그녀의 마음을 돌렸던 것입니다. 자신이 농구 대표선수로 세운 공적에 따른 체육연금, 농구계 후배들의 따뜻한 지원도 적지 않은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녀의 몸은 지금도 여전히 정상이 아닙니다. 심장을 비롯한 내부 장기가 비정상적으로 성장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억제하는 주사와 치료약이 한 번에 300만 원, 고맙게도 ‘우리나라 농구에 기여한 분’이라며 병원 측이 경비를 부담해 준다고 합니다.

몸과 마음의 기력을 회복하며 그녀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당부를 떠올렸습니다. “네가 먼저 고개를 숙이고 남들에게 베풀어야 한다.” 그녀 자신도 ‘받기만 해선 도리가 아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면도날을 끼우는 부업, 양말의 실밥을 따 주는 부업으로 생긴 몇 푼의 돈으로 이웃돕기에 나섰습니다. 추운 겨울 따뜻한 호박죽을 끓여 이웃 독거노인들에게 대접했습니다. 다음 날 할머니들이 “이쁜아!”하고 부르며 밑반찬을 챙겨다 주시더랍니다. 그녀는 ‘이것이로구나. 고개를 숙이고 베푸니까 다가오는구나’ 하고 어머니의 가르침을 새삼 가슴에 새긴다고 말합니다.
 
장애인을 위한 자원봉사에도 참여했습니다. 그들의 고통을 지켜보며 절로 눈물이 솟았습니다. ‘20년 동안 내가 겪은 아픔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고 스스로 부끄러워했습니다. 봉사 속에 무한한 행복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살아 숨 쉬는 동안 더 베풀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고 합니다.
 
그녀의 소망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없어졌을 때에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고 싶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여자선수가 있었는데 그 마음이 솜사탕이더라.’ 이런 말을 듣고 떠난다면 정말 보람 있는 삶을 산 것이 아닐까요?” 덩치에 비해 그녀의 소망은 너무도 소박했지만 덩치보다 훨씬 더 크게 제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그녀의 남은 생애가 지금처럼 밝고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소박한 소망이 꼭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그룹은 특정한 주의나 입장을 표방하지 않습니다.

필자소개

방석순

스포츠서울 편집국 부국장, 경영기획실장, 2002월드컵조직위원회 홍보실장 역임. 올림픽, 월드컵축구 등 국제경기 현장 취재. 스포츠와 미디어, 체육청소년 문제가 주관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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