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은 신기루였다"


1965년 현대건설이 타이의 고속도로를 지으며 시작된 국내 기업의 해외 건설 시장 진출이 올해로 꼭 50년째다. 우리 건설업계는 해외 건설 50주년을 맞아 해외 수주 누계 7000억달러라는 대기록 달성을 눈앞에 뒀다. 반백년의 시간 동안 국내 건설업은 양적, 질적으로 눈부시게 성장했다. 하지만 성장의 이면엔 알려지지 않은 어두운 구석이 자리하고 있었다. 

중동 지역의 플랜트 건설에 집중된 국내 기업들의 해외 건설현장은 강자의 ‘갑질’이 횡행하는 감시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바다 건너 먼 이국의 땅에선 ‘공정거래’와 ‘상생’이란 인간의 법칙보다 ‘약육강식’과 ‘승자독식’ 같은 동물의 법칙이 먼저 적용됐다. 박근혜 대통령은 “‘제2의 중동 붐’을 일으키자”며 청년과 기업의 해외 진출을 독려하고 있지만, 지난 10년 동안 해외 건설 사업을 주로 해온 이봉진(76·사진) 에스엠종합개발 전 대표는 중동을 “그저 신기루일 뿐”이라고 했다. 얼마 전까지 전문건설업체의 대표였던 그는 지금 사우디아라비아 쿠라야 건설현장에서 계약을 맺었던 원청 대기업과 기약 없는 싸움을 벌이고 있다. 글 박기용 기자 xeno@hani.co.kr,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중동의 신기루, 이봉진 사장의 깨진 꿈

사우디 쿠라야 발전소 건설현장서
이봉진 사장의 꿈은 어떻게 깨졌나
▶ 틈만 나면 해외로 나가는 박근혜 대통령은 ‘제2의 중동 붐’을 이야기하며 청년과 기업의 중동 진출을 독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열사의 사막엔 뜨거운 모래바람보다 더 견디기 힘든 원청 대기업과 하청 중소기업의 불공정 하도급 관행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봉진 에스엠종합개발 전 대표는 용기를 낸 고발자입니다. 다수의 피해자들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습니다. 50년 해외 진출 역사를 무색하게 만드는 해외 건설현장의 불공정 하도급 관행을 뿌리뽑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대기업 갑질과 싸우는 게 모래바람보다 힘들었다”

“대통령은 겉만 보는 겁니다.”

전기공사를 전문으로 하는 중소 건설업체인 에스엠종합개발의 이봉진(64) 전 대표는 30여년 동안 건설업에 종사해 왔다. 특히 지난 10년 동안은 중동 등지의 해외 플랜트 건설 현장에서 원청 대기업의 하도급을 받아 일했다. 플랜트는 전력을 생산하는 발전소나 바닷물을 식수로 만드는 담수화 시설을 이르는데, 사막 지역인 중동에 주로 플랜트 공사가 많다. 지난달 27일 서울 금천구 가산동 회사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중동을 “기회의 땅이라기보다 신기루에 가까운 곳”이라 했다. 사우디아라비아 복합화력발전소 공사를 끝으로 지난 2월 현업에서 물러난 그는 아직 회사로 출근한다. 사우디 현장의 원청 대기업과 마무리짓지 못한 중요한 일이 남았기 때문이다. 말레이시아, 쿠웨이트, 마다가스카르, 요르단, 적도기니 등의 해외 현장을 돌며 사업을 이어가는 동안 그는 원청과의 분쟁에서 국내 기관의 도움을 받은 경험이 없다. 그에게 해외, 특히 중동의 건설현장은 약육강식의 난맥상이다. 하청 중소기업은 원청 대기업이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해야 한다.

그런 곳으로 대통령은 청년과 중소기업을 가라 한다. 지난 3월19일 정부는 제7차 무역투자진흥회의를 열고 ‘제2의 중동 붐’을 조성하겠다며 중동 지역에서 해외건설과 대형 플랜트 건설 사업에 참여하는 기업을 위해 5조원 규모의 정책금융 자금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날 회의에서 “누가 청년들이 어디 갔냐고 물으면, 다 중동 갔다는 말이 나올 만큼 우리 청년들의 중동 진출을 적극 추진하라”고 했다. 이 전 대표는 답답하기만 하다.

“해외 건설사업을 지나치게 쉽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분쟁이 생겨도 제대로 처리도 못 하면서… 공부하고 준비해서 가야 하는데,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삼성물산이 2011년 수주한 사우디아라비아 동부 쿠라야 지역의 세계 최대 규모 복합화력발전소 전경

삼성물산이 2011년 수주한 사우디아라비아 동부 쿠라야 지역의 세계 최대 규모 복합화력발전소 전경. 이봉진 전 대표의 에스엠종합개발을 비롯해 삼성물산으로부터 하도급을 받아 이곳에서 일한 5개 하청업체들은 공사 대금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원청 대기업의 ‘갑질’에 시달려야 했다고 주장했다. 삼성물산 제공

저가수주 경쟁에 뛰어든 대기업들

이 전 대표가 대표직을 내려놓기 전 마지막으로 함께 일한 ‘원청’은 삼성물산(건설부문)이다. 삼성물산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141층짜리 인공구조물인 두바이의 ‘부르즈 할리파’를 시공한 것으로 유명하다. 사흘에 한층씩 층고를 올리고 세계 최고인 126층 높이(452m)까지 한번에 콘크리트를 쏘아올린 기술로 주목받았다. 대만의 ‘타이베이 금융센터’, 말레이시아의 ‘페트로나스 타워’ 등 세계에서 가장 높은 3개의 마천루가 모두 삼성물산의 작품이다. 국내 건설업계의 해외 진출 50년 역사가 이뤄낸, 상징 같은 존재다.

사우디아라비아 동부의 사막지대 ‘쿠라야’도 삼성물산에는 부르즈 할리파의 명성을 굳힐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다. 최고 온도가 50도를 넘고 모래바람이 건설장비를 삼켜버리는 최악의 조건은 역설적으로 건설업체에 실력과 기술력을 보여주는 보증수표가 될 수 있었다. 2011년 삼성물산은 이곳에 들어서는 세계 최대 복합화력발전소 프로젝트(3조2000억원 규모)를 수주했다.

누군가에게는 쾌거였지만, 누군가에게는 불운의 시작이었다. 당시는 국내 플랜트·건설업계의 ‘저가수주’ 경쟁이 한창이던 때였다. 쿠라야에 대해서도 비슷한 지적이 일었다. 삼성물산이 낙찰받은 금액은 입찰에 참여한 다른 업체가 제시한 가격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단 말도 돌았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일어나자 국내 건설사들은 수주 물량 확보를 위해 본격적인 경쟁에 뛰어들었다. 무리한 저가 경쟁은 얼마 지나지 않아 대규모 손실로 이어졌다. 금융위기 이듬해인 2009년 해외 수주액이 80억6600만달러로 국내 건설사 중 가장 많았던 삼성엔지니어링은 4년 뒤인 2013년 1조원대의 대규모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64억7600만달러로 수주액 2위였던 지에스(GS)건설도 같은 해 9000억원에 달하는 영업손실을 냈다. 그해 대림산업은 103억원의 순손실을 내 적자로 전환했고, 대우건설도 7180억원의 순손실을 기록했다.

경쟁이 격화되면서 각종 잡음도 일었다. 2013년 3월 삼성물산은 오스트레일리아 광산을 개발하는 ‘로이힐 프로젝트’의 인프라 공사를 56억달러에 수주했다. 경쟁 컨소시엄보다 7억달러 낮은 액수였다. 4~5년 전부터 이 프로젝트에 공을 들인 에스티엑스(STX)건설은 “삼성물산이 덤핑 수준의 낮은 가격을 써내 과당경쟁을 조장하며 국익을 훼손했다. 응분의 조치를 내려달라”며 정부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해외 건설시장에서 국내 기업끼리 다툰 저가수주 논란은 결국 그해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무회의에서 다뤄졌다.

이 전 대표의 에스엠종합개발이 삼성물산과 계약을 체결하고 복합화력발전소를 짓는 쿠라야 현장에서 전기, 배관 등을 시공하기 시작한 시기는 국내 건설 대기업들의 저가수주 경쟁이 부작용을 낳기 시작한 2012년 7월이었다. 원청인 건설 대기업의 저가수주는 하청 중소기업에는 목줄을 죄어오는 일이었다.

쿠라야 현장의 문제는 착공 직후부터 발생했다. 건설공사는 토목과 철골, 기계, 배관, 전기 등의 순서로 순차적으로 진행된다. 그런데 앞 순서부터 공정이 늦어졌다. 토목 공정을 맡은 업체가 갑자기 부도가 난 것이다. 또 다른 업체는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삼성물산이 관리하는 터빈, 보일러 같은 기자재 공급도 계획보다 늦어졌다. 예정된 공기를 맞추려다 보니 순차적으로 이뤄져야 할 공정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됐다. 공정관리는 삼성물산이 책임져야 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구조적으로 생산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게 에스엠종합개발을 비롯한 현장 하도급 업체들의 주장이다.

에스엠종합개발이 지난해 9월29일 삼성물산에 낸 진정서를 보면 이런 상황이 구체적으로 묘사돼 있다. 맨홀과 맨홀을 전기배관으로 연결하는 ‘덕트 런’ 공사를 하려면 맨홀 설치공사와 동시에 전기배관을 할 수 있도록 미리 맨홀 사이에 터파기가 돼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해당 공정을 맡은 업체는 맨홀만 설치한 뒤 전기배관용 터파기 작업을 몇 달에 걸쳐 나눠 했다. 이 때문에 에스엠종합개발도 같은 장소의 전기배관 작업을 수차례에 걸쳐 나눠 해야 했다. 선행 공정을 맡은 다른 하청사가 계획과 달리 갑자기 야간에 작업하는 일도 잦았다. 자연히 에스엠종합개발 쪽 인력도 함께 야간 작업을 했다. 계획에 없던 인건비가 그만큼 늘었다. 삼성물산이 관리하는 자재 공급도 원활하지 않았다. 불량 도금된 배관이 공급되기도 했고, 배관의 규격이 주문과 달라 그에 맞춰 시공계획을 변경해야 하는 일도 있었다. 공급량도 그때그때 필요한 양을 맞추지 못해 작업 진행을 더디게 했다.

최근 5년간 해외건설 신고업체 및 수주액 추이
최근 5년간 해외건설 신고업체 및 수주액 추이

사우디 쿠라야 복합화력발전소
건설수주한 삼성물산과 계약해
2012년부터 전기·배관 등 시공
그것은 스스로의 목줄을 죄는
하청기업 추락의 시작이었다

착공 직후부터 공정 뒤죽박죽에
공사대금 지급도 원활치 못해
직원들은 물 사먹을 돈조차 없었다
급기야 원청 쪽은 계약해지 통보에
“보증금 내놔라” 본드콜을 걸었다

고용한 필리핀 기능공들 파업까지

건설 현장에선 이렇게 애초 계획에 없던 작업을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이에 대한 책임소재와 비용문제를 명확히 하기 위해 별도의 작업지시서(워크 오더)를 발행한다. 기록을 남기려는 것이지만, 하청업체들의 작업지시서 발행 요청은 번번이 묵살됐다.

이 전 대표의 에스엠종합개발과 함께 쿠라야 현장에서 삼성물산의 다른 하도급업체 관계자들도 할 말이 많았다. 한 기계업체 관계자는 “삼성물산의 한 현장 간부는 회의를 하다 말고 문을 열고는 ‘내 말 안 들을 거면 (한국으로) 가라’고 했다.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하도급 업체 사람들을 함부로 대했고 요구나 건의는 묵살했다. 일방적으로 ‘사람을 더 대라’, ‘연장작업을 하라’고만 했다”고 말했다.

계약 외에 추가로 공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해도 삼성물산 현장 관리자들은 이를 방관했고, 별도의 작업지시서 없이 구두로만 작업을 지시했다고 한다. 하청업체들이 들인 추가비용에 대해 책임지지 않으려는 태도가 계속됐다는 게 현장 하청업체 관계자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역시 익명을 요구한 또 다른 하청업체 현장 책임자는 “선행 공정의 문제로 우리에게 주어진 16개월의 공기 중 이미 6개월을 까먹고 시작한데다, 비자 문제로 인력수급이 어려워졌는데도 배려가 없었다. 중간에 삼성물산 쪽 현장 책임자가 바뀌면서 구두로 작업지시를 한 부분에 대한 보상도 받지 못했다. 삼성물산이 쿠라야에서 손해를 봤으니 하청업체도 손해를 봐야 하지 않겠냐는 식이었다”고 했다.

쿠라야에선 공사대금 지급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한다. 계획된 공정대로 공사가 진행되면 원청업체는 그에 따라 하청업체에 달마다 공사를 수행한 대가로 자금을 지급한다. 이를 ‘기성’이라 하는데 매번 부족한 금액이 들어왔다고 한다.

에스엠종합개발의 쿠라야 현장 관계자는 “전기 케이블을 예로 들면, 공사에 필요한 케이블이 100미터인 경우 필요한 만큼 잘라 쓰려면 그보다 더 여유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삼성물산은 정확히 100미터만큼만 돈을 줬다”고 했다. 현장 근로자의 임금을 주고 장비업체 등에 대금을 지급해야 하는데, 기성금이 부족해 자체 자금을 써야 했다. 이 전 대표는 “나중엔 손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불어나더라. 더 이상 집어넣을 돈이 없게 됐다”고 했다.

에스엠종합개발의 경우 쿠라야 현장에 지원한 자체 자금이 30억원을 넘어선 지난해 1월부터 본격적인 자금 부족 상황에 시달렸다. 다행히 협의가 이뤄져 이후 쿠라야 현장에서 발생하는 각종 비용을 삼성물산이 ‘직불’ 하기로 했다. 부담을 덜었다 생각했지만 삼성물산은 직불 첫달부터 제출한 영수증만큼 돈을 주지 않았다.

이봉진 에스엠종합개발 전 대표가 지난달 27일 오후 서울 금천구 가산동 회사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

이봉진 에스엠종합개발 전 대표가 지난달 27일 오후 서울 금천구 가산동 회사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 지난 2월 대표직을 사임한 그는 회의실로 쓰던 공간에 컴퓨터를 가져다 놓고 임시 사무실로 쓰고 있다. 회의실 벽면엔 그동안 그의 회사가 수주한 해외 건설현장의 사진들이 붙어 있다. 그는 “중동은 기회의 땅이라기보다 신기루에 가까운 곳”이라 했다.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왜 제대로 주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줄 돈이 없고, 영수증을 못 믿겠다고 하더군요. 인건비 정도만 주고 자재비, 경비는 안 줬어요. 그러다 보니 현장은 점점 어려워지고…. 나중에는 우리 직원들이 물 사먹을 돈이 없다고 얘기할 정도였습니다.”

이 전 대표의 말이다. 지난해 4~5월부터 현장에선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된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에스엠종합개발이 고용한 필리핀 기능공들이 파업을 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같은 공정에서 일하면서도 삼성물산에 고용된 이들과, 에스엠종합개발에 고용된 이들이 받는 급여가 달랐던 게 원인이었다. 사우디 내 필리핀 대사관에서 노무관을 파견해 계약서를 검토하는 등 문제가 커졌지만, 애초 계약사항을 노무자들이 충분히 인지하지 못해 발생한 일이라는 이유로 무마됐다. 에스엠종합개발로선 위기를 넘겼지만 이 일은 계약해지의 빌미가 됐다.

삼성물산이 계약해지 요청 공문을 보내온 것은 쿠라야의 예정 준공일인 지난해 6월30일을 2주 남겨놓은 6월17일께였다. 재무 상태가 취약한데다, 필리핀 노동자 파업 등으로 현장에서 문제를 일으켜 “자격이 없으니 나가라”고 했다고 한다. 에스엠종합개발로선 일을 거의 마무리지어 놓은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계약해지 통보를 당한 셈이었다. 삼성물산은 엿새 뒤인 23일까지 현장에서 서둘러 철수하라는 공문도 보냈다. 그러면서 미리 직불로 지급한 돈을 돌려받아야 한다며 현장 장비나 자재를 담보로 잡았다. 현지 노동자들 사이에 에스엠종합개발이 ‘야반도주’를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현지 하도급 업체와 자재·장비업체, 인력업체 등에 대금도 제대로 지급하지 못한 채 쫓기듯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직원들을 기다리는 건 삼성물산이 전기공사공제조합 쪽에 요청한 ‘본드 콜’이었다.

본드 콜은 계약이 파기될 경우 원청이 그에 따른 피해 금액을 하청의 보증을 선 금융기관에 청구하는 것을 말한다. 계약상 삼성물산이 갖는 정당한 권리였다. 하지만 전기공사공제조합은 삼성물산의 청구에 응하지 않은 채 보증금 지급을 보류했다. 당사자 간 다툼이 있으니 제3의 중재기관을 통해 합의를 보라는 것이었다. 합의를 보기까진 에스엠종합개발에 대한 추가보증도 없었다. 에스엠종합개발은 추가 공사수주와 자금 융통이 어렵게 됐다. 그렇게 10개월이 흘렀다. 이 전 대표는 “공사 대금 정산도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에서 ‘본드 콜만이라도 일단 해지해달라’ 통사정했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했다.


삼성물산 “도움 준 기억밖에 없다”

하청업체들에 대한 삼성물산의 태도는 완강했다. 쿠라야 현장 상황에 대한 인식도 차이가 컸다. 삼성물산 관계자들은 지난달 28일 <한겨레>에 “쿠라야 프로젝트 수행 중 2개 회사가 법정관리와 부도를 맞은 사실이 있지만, 이는 해당 회사 자체 재무 운영의 문제로 인한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에스엠종합개발을 비롯한 다른 하청업체들이 제대로 대금을 받지 못한 상황에 대해서도 “기성금 지급은 지연 없이 정상적으로 이뤄졌으며, 현재 문제가 된 것은 공사 마무리 시점에 신청해 누락된 기성금과 정산에 대한 이견으로 합의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했다. 

삼성물산이 뚜렷한 이유 없이 정산을 미루고 있다는 하청업체들의 주장에 대해선 “하청업체들의 명확한 증빙서류 미제출, 과도한 손실보전 요구 등으로 합의가 지연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쿠라야 현장에서 일한 삼성물산 관계자는 “협력업체의 재무 상황이 악화되면서 프로젝트의 정상 진행과 상생 차원에서 운영자금을 지원했다. 그럼에도 결국 공사 진행이 어렵게 되자 (삼성물산의) 직영으로 추가적인 금액과 자원을 투입해 잔여공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우리는 협력업체들에 도움을 준 기억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삼성물산으로부터 하도급 대금 정산을 받지 못한 하청업체는 에스엠종합개발을 비롯해 기계업체인 ㅂ사, ㄷ사, ㅈ사와 전기업체인 ㄷ사 등 5개사다. 하지만 이 전 대표를 제외한 다른 회사 관계자들은 이름 공개를 꺼렸다. 자칫 삼성물산으로부터 대금을 받지 못하거나 추가 수주를 못 받게 될까 우려해서다. 50억원가량을 받아야 한다는 에스엠종합개발은 삼성물산의 제안에 따라 국내외 상거래 분쟁을 중재하는 대한상사중재원의 중재를 받기로 했다. 197억원의 대금을 받지 못했다는 ㅈ사는 삼성물산을 공정거래위원회에 제소했다. 원청 삼성물산과 하청 중소기업들 간의 문제는 이제 이들 중재기관의 손으로 넘어갔다.

쿠라야 현장에서 일어난 원청과 하청 간의 분쟁은 사실 해외 건설현장에선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최근엔 두산중공업이 베트남의 석탄화력발전소를 짓는 과정에서 공기가 지연되자 협력업체에 긴급공사를 요청하며 그에 따른 추가비용 지급을 약속하고는, 준공을 목전에 두고 계약을 해지한 일이 있었다. 두산중공업 역시 삼성물산처럼 보증을 선 금융기관에 청구해 계약이행 보증금도 회수해 갔다. 해당 협력업체는 부도를 막기 위해 사옥을 매각해야 했다. 기업의 이름과 현장만 다를 뿐 비슷한 일이 반복되는 것이다.

지난해 7월 공정거래위원회와 국토교통부는 이러한 해외건설의 불공정거래 관행을 개선하기 위해 ‘해외건설업 표준하도급계약서’를 만들었다. 표준계약서를 만드는 과정에서 공정위 등이 조사한 자료를 보면, 에스엠종합개발과 다른 하청업체들이 쿠라야에서 겪은 것과 비슷한 사례들이 등장한다.

사례를 보면, 중앙아시아 지역의 한 발전소 공사를 맡게 된 원청 사업자는 하도급 업체 선정 과정에서 촉박한 공사 일정 등을 이유로 현지법인 설립을 사전 조건으로 제시했다. 낙찰자로 선정되지 못한 수급 사업자들은 현지 법인 설립 비용 등의 피해를 봐야 했다. 공사가 진행되는 도중 현지 법인 설립을 강요받은 사례도 있었다. 해당 원청 대기업은 하도급 업체에 현지 법인을 설립하지 않으면 공사 계약을 취소하는 등 불이익을 주겠다고 했다. 하도급 업체는 법인을 설립했지만 공사 이윤을 고스란히 법인 설립 비용으로 물어야 했다.

계약이행 보증을 국내에서보다 많이 요구한 사례도 있었다. 하도급 계약대로 공사가 이행되지 않으면 국내에선 통상 계약금액의 10%를 보증금으로 요구하는데, 이를 25%까지 올린 것이다. 하도급 업체는 보증금 액수가 커진 만큼 보증 기관을 구하기 어렵게 됐고 수수료도 더 많이 물어야 했다. 전문건설업체들은 으레 각자가 속한 전문건설공제조합에서 보증을 받는데, 원청 대기업이 공제조합이 아닌 보증보험기구나 금융기관을 요구한 사례도 있었다. 해당 하도급 업체는 어쩔 수 없이 보증보험이나 금융기관의 높은 수수료를 떠안아야 했다.

쿠라야에서처럼 중간에 설계를 변경한 것에 따른 비용 부담을 하청업체에 떠넘긴 사례도 여럿 있었다. 아예 ‘갑의 지시에 의한 설계변경은 을이 부담한다. 을의 직접공사비가 10% 이상 증가할 경우에만 계약금액을 조정한다’는 내용으로 계약을 했다. 한 원청 대기업은 하도급 대금 중 일부를 하도급 사업자의 의사에 관계없이 해외 현지 미분양 아파트로 대물변제하기도 했다. 해당 국가에선 외국인의 부동산 소유가 제한돼 정식 소유권 이전이 불가능했지만, 원청 대기업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도급 업체에 원가보다 낮은 최저금액 입찰을 노골적으로 요구하는 원청 대기업도 있다고 한다. 이 전 대표는 “쿠라야의 경우 수의계약으로 하청을 받았지만, 통상 원청사가 이미 최저금액으로 입찰한 하청사에 다시 낙찰을 조건으로 더 낮은 가격을 요구하곤 한다. 하청사는 그러다 결국 원가에도 못 미치는 가격으로 낙찰받는다”고 했다. 모두 수년째 해외 건설현장에서 반복해 일어나는 일들이다.


해외건설수주의 절반 넘는 중동
저유가 속 발주 취소나 연기 속출
건설사 수주규모는 수년째 정체
현장서 하청기업 피해 비일비재
호소하거나 해결할 곳은 없어

하도급 대금 정산 요구하며
10개월째 원청대기업과 지난한
싸움 벌이며 잠 못 이루는 나날
반년째 월급 밀린 직원들은
하나둘 회사를 떠나고 있다

‘원청’ 삼성물산쪽 반론
“쿠라야에서 2개 회사가
법정관리와 부도 맞았지만
이는 해당 회사 재무 문제 탓
기성금 정산 등에서도 이견
하청업체서 과도한 손실보전 요구”

정부 대책은 수주물량에만 초점

1차적 문제는 국내 대기업 건설사들의 수주가 중동 플랜트 공사로 집중된 상황에서 저유가 시대를 맞아 중동시장의 발주가 줄거나 연기된 데에 있다.

한국건설관리학회 자료를 보면, 2011년까지 국내 기업의 해외건설 프로젝트 수주는 중동 지역이 2872억달러로 절반 이상인 59.9%를 차지했다. 2000년 이전 해외건설의 72.7%를 차지한 단순 토목공사와 건축공사는 이후 70% 이상의 비중을 차지한 플랜트 건설에 자리를 내줘야 했다. 국내 건설기업들 다수가 중동 지역으로 몰려가 아파트나 빌딩이 아닌 플랜트를 짓는 상황인 것이다.

이 때문인지 건설사들의 해외수주 규모는 수년째 정체 상태다. 국내 기업의 해외건설 진출 현황을 보면, 2006년 165억달러에서 2010년 716억달러로 해마다 사상 최대 수주기록을 갈아치웠다. 그러다 2011년 591억달러로 줄어든 뒤 지난해까지 줄곧 600억달러대에 머물러 있다. 올해 1분기 해외수주 실적은 약 132억달러였다. 지난해 같은 기간 175억달러에 견줘 25% 줄어든 수치다. 지속되는 유가 하향세는 중동 시장에서 발주처들이 발주를 취소하거나 연기하는 상황을 가져왔다. 자연히 경쟁 완화를 위해 시장 다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해외라는 지정학적 배경도 원하청 간의 불합리한 관계를 부채질한다. 해외건설 하청업체인 한 중소기업 관계자는 “최근엔 해당 국가 법규에 따라 현지에 법인을 설립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현지 법인들 간의 문제가 돼 버려 하도급과 관련한 국내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다”고 했다.

하청업체로선 원청과의 분쟁 상황을 제대로 따져볼 기회도 얻기 힘들다. 해외건설 계약은 대체로 분쟁이 발생할 때 발주처가 지정한 국가의 법원에서 소송으로 해결하게 돼 있다. 원청인 대기업은 자신의 하청업체와의 계약에도 이런 내용을 그대로 적용한다. 에스엠종합개발이 삼성물산과 맺은 계약서엔 분쟁 발생 시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지정한 영국 법원에서 소송을 하는 것으로 돼 있다. 자연히 하청업체는 소송을 낼 엄두를 내지 못한다. 

이런 문제 때문에 지난해 정부가 마련한 ‘해외건설업 표준계약서’에는 하도급 관련 분쟁이 일어나면 하도급분쟁조정협의회나 대한상사중재원에 중재를 의뢰해야 한다고 적시돼 있다. 에스엠종합개발처럼 원청 대기업의 판단에 따라 계약과 별도로 중재원을 찾는 일이 더러 있지만, 표준계약서를 기반으로 대한상사중재원에 중재를 의뢰한 사례는 아직 없었다.

정부와 관련 기관의 관심이 필요하지만, 정부 대책은 건설 대기업들의 수주 물량을 늘리는 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2013년 8월 정부는 관계부처 합동으로 ‘해외건설·플랜트 수주 선진화 방안’을 마련해 지금까지 시행해 왔다. ‘방안’은 보증수수료 인하 등 정책금융기관의 해외 진출 건설사 지원을 확대하고 민간금융기관 참여를 활성화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것 등이다. 이에 따라 지난해 2월 해외건설 정책 수립을 지원하고 기업에 진출 전략과 정보를 제공하는 ‘해외건설 정책지원센터’도 개설됐지만, 만연한 불공정 하도급 관행에 관한 대책은 찾기 어렵다. 실제 올해 초 기획재정부는 이 선진화 방안을 중간점검하면서 “중소·중견기업 및 민간 금융기관의 해외 프로젝트 진출, 수주구조 편중 등에 대한 정책효과가 미흡했다”고 돌아봤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불공정 하도급 신고센터’를 설치해 운영하지만 주로 국내 사안에 국한해 조사가 이뤄진다. 국토교통부는 업체별로 2억원 이내인 ‘해외시장 개척자금’을 중소·중견 건설업체들에 지원하고 있을 뿐이다.

쿠라야 현장에서 일하는 에스엠종합개발 노동자들의 모습
쿠라야 현장에서 일하는 에스엠종합개발 노동자들의 모습. 사진 에스엠종합개발 제공


대한상사중재원의 중재엔 큰 기대 안 해

10개월째 하도급 대금 정산을 요구하며 원청 대기업과 지난한 싸움을 벌이는 이 전 대표는 요즈음 좀처럼 잠이 오지 않는 날들을 보내고 있다. 그는 1년치 임금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지난 2월 대표직을 사임했다. 직원들 월급은 반년째 밀려 있다. 급여를 못 받은 직원들은 이미 하나둘 회사를 그만뒀다. 지난해 9월엔 갑상샘암이 재발했다. 의사는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했다.

이 전 대표는 대한상사중재원의 중재에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이미 비슷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수년 전 다른 사우디아라비아 공사 현장에서 준공 일정에 맞추기 위해 추가공사를 했지만 제대로 대금을 받지 못한 일이 있었다. 공정거래위원회를 찾아갔지만 사무관인 직원에게서 “국내에서 일어나는 일도 제대로 다루기 어려운데 해외에서 일어난 일을 어떻게 확인하겠느냐”는 말을 들어야 했다. 공정위 직원이 알려준 ‘조정위원회’란 곳을 찾았다. 이 위원회의 변호사는 당시 원청이 제시한 금액인 40만달러에서 10만달러를 더 얹어줄 테니 고맙게 생각하고 받든지 아니면 소송을 내라고 했다. 울면서 돈을 받아 나왔다.

“정부에선 외화 벌러 해외로 나가라지만, 그곳에서 분쟁이 생기면 해결할 곳이 없습니다. 오직 대기업 눈치만 봐야 하지요. 시키는 대로 다 해주고 나면 돈도 제대로 못 받습니다. 이런저런 핑계로 ‘갑’이 시간을 끌면 우리 같은 ‘을’은 도산합니다. 중동으로 가라구요? 체감온도 50도가 넘는 사막의 모래바람 속에선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해요. 대기업의 갑질과 싸우는 일이 우리에겐 그 모래바람과 싸우는 일보다 더 힘듭니다.”

이 전 대표의 목소리에서 쇳소리가 났다. 이 전 대표가 앉은 자리 뒤로 퇴사한 직원들로 곳곳이 비어 있는 사무실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32년 전 입사 1년 만에 부도가 나버린 첫 직장을 떠올렸다. 당시 그의 회사는 사우디아라비아 도로 공사에서 대규모 적자를 봤다. 지금은 고인이 된 사장은 귀국 비행기편에서 “사우디 공사가 어려운 줄 몰랐다”며 눈물을 흘렸다. 이 전 대표는 이제 그 눈물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겨레신문 박기용 기자 xe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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