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 껍질을 밟으면 미끄러지는 이유 -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이그노벨상의 재발견

영화 ‘폭풍의 언덕’의 각색 작가인 찰스 맥아더가 찰리 채플린에게 뻔한 장면을 어떻게 참신하게 만들 수 있을지 물었다. “예를 들어 뚱뚱한 여자가 5번가를 걸어가다 바나나 껍질을 밟고 넘어진다면 관객들이 여전히 웃을까요? 수도 없이 연출된 장면인데.”

 

 맥아더는 계속 물었다. “먼저 바나나 껍질을 보여주고 뚱뚱한 여자가 다가와 넘어지게 할까요? 아니면 뚱뚱한 여자를 먼저 등장시키고 다음에 바나나 껍질을 보여주고 여자가 넘어지게 할까요?”

 

 채플린이 대답했다. “둘 다 아닙니다. 뚱뚱한 여자가 다가옵니다. 그리고 바나나 껍질이 보이지요. 다음으로 뚱뚱한 여자와 바나나 껍질이 함께 잡힙니다. 그리고 여자가 바나나 껍질을 피하다가 맨홀에 빠져 사라지죠.”
- 댄 쾨펠, ‘바나나’

 

다음 주 우리나라 과학계는 상당히 긴장할 것 같다. 한국인 노벨상 수상자가 나올 확률이 그 어느 해보다고 높기 때문이다. 과학계의 이런 긴장감을 누그러뜨리기 위함인지 진짜 노벨상 수상자 발표 서너 주 앞서 기상천외한 연구(또는 일)를 한 사람들에게 주는 ‘이그노벨상’이 발표된다.

 

올해 이그노벨상도 보니 다들 웃긴 내용들이다. 이런 연구를 왜 했을까 싶은 주제도 있지만 좀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연구도 있었다.

 

특히 필자는 2012년 한 저널에 ‘바나나 껍질의 마찰계수’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한 일본의 연구진이 수상한 물리학상에 관심이 갔다. 바나나 껍질이 왜 미끄러운가에 대한 이유를 밝힌 연구라는 것이다.

 

 

바나나 껍질을 밟으면 왜 미끄러지는가를 밝힌 일본 연구자들이 2014 이그노벨상(물리학 부문)을 받았다. - 위키피디아 제공

애니메이션에서는 바나나 껍질을 밟아 뒤로 넘어지는 장면을 과장해서 표현하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수년 전 길을 가다 정말로 바나나 껍질을 밟은 적이 있다. 아마 딴 생각을 하고 걷다가 못 본 것 같은데 바나나 껍질을 밟은 발이 앞으로 쭉 나가면서 휘청했지만 간신히 넘어지지는 않았다. 

 

그때 생각이 나 연구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려고 ‘있음직하지 않은 연구 연감’ 사이트(www.improbable.com)를 들어가 봤더니 다행히 논문 파일을 구할 수 있었다. 일본 트라이볼로지학회에서 발행하는 학술지 ‘트라이볼로지 온라인’에 실린 논문으로 5쪽 분량에 내용도 쉬워 고교 물리 시간에 다루면 딱 좋을 내용이었다. 트라이볼로지(Tribology)는 마찰과 마모, 윤활에 관련된 현상을 다루는 학문분야다.

 

마찰계수 6분의 1로 줄어

연구자들은 바나나 껍질이 얼마나 미끄러운지 알아보기 위해 마찰계수(frictional coefficient)를 측정했다. 마찰계수는 마찰력과 수직항력 사이의 관계를 이어주는 계수(마찰력=마찰계수×수직항력)로 마찰계수가 작을수록 잘 미끄러진다. 마찰계수는 면 자체의 특성이 아니라 접촉하는 두 면의 재질에 따라 결정된다. 예를 들어 상자를 빙판 위에 두고 옆에서 밀면 약간만 힘을 줘도 움직이지만(마찰계수가 작아 마찰력이 작다), 그냥 땅 바닥에 두면 더 큰 힘을 줘야 움직인다.

 

연구자들은 리놀륨 재질의 바닥에 놓인 바나나 껍질을 구두를 신은 발로 밟는 상황에서 측정했다. 바나나 껍질을 두는 방법은 두 가지로 매끄러운 바깥쪽 면이 위로 오는 경우와 부드러운 안쪽 면이 위로 오는 경우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더 미끄러울까. 신발 바닥이 매끄러운 바깥쪽 면에 닿았을 때일까. 여기서 잠깐 생각해야 할 것은 바나나 껍질 실험의 경우 두 면이 아니라 네 면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다. 즉 신발 바닥과 바나나 껍질 양면, 리놀륨 바닥이다. 참고로 리놀륨 바닥은 신발 바닥보다 매끄럽다.

 

따라서 얼핏 생각하면 매끄러운 바나나 껍질 바깥쪽 면과 리놀륨 바닥이 닿는 경우에 마찰계수가 더 낮을 것 같다. 실험 결과 이 경우 마찰계수는 평균 0.123으로 유자 껍질의 0.125와 거의 같은 값이었다. 따라서 이게 정답이라면 바나나 껍질이 미끄럽다는 말은 과장인 셈이다.

 

걸을 때 미끄러지지 않으려면 마찰력이 수평방향의 힘보다 커야 한다. 마찰력은 수직항력에 마찰계수를 곱한 값이므로 마찰계수가 작을수록 마찰력이 작아 넘어지기 쉽다.   - Tribology Online 제공
걸을 때 미끄러지지 않으려면 마찰력이 수평방향의 힘보다 커야 한다. 마찰력은 수직항력에 마찰계수를 곱한 값이므로 마찰계수가 작을수록 마찰력이 작아 넘어지기 쉽다.   - Tribology Online 제공

 

다음으로 바나나 껍질 바깥쪽 면이 신발 바닥과 닿는 경우 마찰계수를 측정했는데 앞 조건의 절반에 불과한 평균 0.066이 나왔다. 참고로 신발과 리놀륨 바닥이 직접 닿는 경우, 즉 그냥 걸을 때는 마찰계수가 평균 0.412였다. 즉 바깥쪽 면이 위를 향한 바나나 껍질을 밟을 경우 리놀륨 바닥을 밟을 때보다 마찰계수가 6분의 1로 줄어 훨씬 미끄러운 상태가 된다. 참고로 설원에서 스키를 탈 때 마찰계수는 0.04 정도다.

 

논문에는 사람이 걸을 때 바닥에 가해지는 힘을 분석한 내용도 있는데 꽤 흥미롭다. 즉 우리가 발을 내디딜 때 보통 15도 정도 기울어져(θ=15°, 수직선 기준) 힘이 가해진다고 한다. 따라서 수직성분의 힘은 Fcosθ, 수평성분(진행방향)의 힘은 Fsinθ이다. 따라서 마찰력(마찰계수×Fcosθ)이 수평성분의 힘보다 커야 미끄러지지 않는다. 마찰계수가 0.066일 때 각도의 한계는 3.8도로 15도일 때는 수평성분의 힘이 더 커 결국 앞으로 쭉 미끄러지게 된다. 겨울에 빙판길을 걸을 때 본능적으로 보폭을 줄이는 것도 수평성분의 힘을 마찰력보다 작게 해 미끄러지지 않기 위함이다.

 

껍질 으깨지며 과립 젤이 균일한 졸이 돼

그렇다면 왜 바나나 껍질 안쪽 면이 아니라 바깥쪽 면을 밟을 때 더 미끄러운 걸까. 바나나 껍질의 입장에서 면이 어긋나는 지점, 즉 미끄러지는 현상이 일어나는 곳이 안쪽 면이기 때문이다. 즉 바나나 껍질을 밟으면 안쪽 면이 바닥에서 미끄러지면서 넘어지는 것이다. 바나나 껍질이 미니 보드인 셈이다.

 

바나나 껍질(epicarp)의 단면을 보면 수 마이크로미터 크기의 과립젤(follicular gel)로 이뤄져 있다. 껍질을 밟으면 눌려 과립이 터지면서 균일한 졸(homogeneous sol) 상태로 바뀌면서 유동성이 커져 바닥 면에서 쉽게 미끄러진다. - Tribology Online 제공
바나나 껍질(epicarp)의 단면을 보면 수 마이크로미터 크기의 과립젤(follicular gel)로 이뤄져 있다. 껍질을 밟으면 눌려 과립이 터지면서 균일한 졸(homogeneous sol) 상태로 바뀌면서 유동성이 커져 바닥 면에서 쉽게 미끄러진다. - Tribology Online 제공

 

연구자들은 바나나 껍질을 현미경으로 자세히 들여다봤다. 그 결과 껍질 속은 그냥 부드러운 재질의 연속체가 아니라 셀룰로오스 막으로 둘러싸인 수 마이크로미터 크기의 과립으로 이뤄진 젤(gel) 형태였다.

 

이 상태에서 발에 밟혀 눌리면 과립이 터져 내용물(다당류와 단백질)이 흘러나오면서 균일한 졸(sol)의 상태로 바뀐다는 것. 그 결과 유동성이 커져 거칠기가 수십 마이크로미터인 리놀륨 바닥 위에서 쉽게 미끄러진 것. 반면 껍질의 안쪽 면이 거칠기가 수 밀리미터인 신발 바닥과 닿을 경우 균일한 졸이 형성되지 않아 덜 미끄럽게 된다.

 

바나나를 먹게 되면 어느 쪽 면을 밟느냐에 따라 정말 미끄러운 정도가 다른지 실험해보고 싶은 생각이 문득 들지만, 안 그래도 오래 앉아있어 허리가 안 좋은 필자가 화를 자초하는 것 같아 자제해야겠다.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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