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딧불이를 찾아서 [임철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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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를 찾아서

2014.09.01


음력 초엿새, 눈썹 같고 손톱 같은 초승달이 가녀리게 하늘에 떠 있습니다. 옆 사람의 얼굴도 분간하기 어려운 어둠 속에서 사람들은 앞 사람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초등학생이나 그 아래의 어린이들을 업고 안고 손을 잡고 걷는 부부가 대부분입니다. 전북 무주군 무주읍 가옥리의 갈골, 8월의 마지막 토요일 밤에 늦반딧불이를 마지막으로 만나는 곳입니다.

대여섯 가지는 됨직한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바닥이 허옇게 보이는 길을 조심조심 걷다 보니 반딧불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불이 수직으로 날아오르거나 머리 위를 가로지를 때, 빙빙 윤무를 출 때 사람들은 탄성을 지르며 반겼습니다. ‘원숭이도 자식을 업고 가리켜 보이는 반딧불이.’ 서양 교과서에도 작품이 실려 있다는 일본의 하이쿠(俳句) 시인 고바야시 잇사(小林一茶·1763~1828)의 작품입니다. 길을 따라 올라갈수록 반딧불이는 더 늘어났습니다.

‘반딧불이로 별을 대적하랴’하는 우리 속담이 있지만, 뿌려진 듯 무수히 떠 있는 하늘의 별과 반딧불이의 반딧불은 크기가 같아 보였습니다. 하늘의 별은 움직이지 않는데 지상에서 솟아오른 별은 한곳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별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지상에 머물러 사는 인간의 어리석은 착각일 뿐입니다. 반딧불이도 날아다니는 것은 모두 숫놈일 뿐 암놈은 솟아오르지 못합니다.

날쌘 이들은 반딧불이를 손으로 잡아서 불이 꺼질세라 죽을세라 조심조심 들여다봅니다. 반딧불이를 잡아 호박꽃 속에 넣고 초롱불이라고 했던 어린 시절, 그 청정했던 무공해 시대가 생각났습니다. 반딧불이의 빛은 열기가 없습니다.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1867~1902)라는 일본 하이쿠 시인은 ‘손바닥 안의/반딧불이 한 마리/그 차가운 빛.’이라고 했습니다. 요사 부손(謝蕪村·1716~1784)의 작품에는 ‘꿈속 일인 듯/손끝으로 잡아 본/작은 나비.’라는 게 있는데, 이 시의 작은 나비를 반딧불이로 바꿔 읽어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반딧불이는 쉽게 잡히지 않습니다. ‘여기야 여기/불러도 반딧불이/떠나 버리네.’ 우에지마 오니쓰라(上島鬼貫·1661~1738)의 여덟 살 때 작품입니다. 다만 반딧불이는 ‘잡으러 오는 이에게/불빛을 비춰 주는/반딧불이.’입니다. 오토모노 오에마루(大伴大江丸·1722~1805)의 시입니다. 그리고 ‘죽은 반딧불이에게/빛을 비추어 주는/반딧불이.’입니다. 이것은 나가타 고이(永田耕衣·1900~1997)의 작품입니다. 이렇게 빛을 내는 것, 그를 통해 소통을 하고 짝을 짓고 이내 죽는 것이 반딧불이의 숙명입니다.

반딧불이를 중국에서는 형화충(螢火) 단조(丹鳥) 단량(丹良) 소촉(宵燭) 소행(宵行)이라고 부른답니다. 그중 소촉은 밤에 켠 촛불이라는 멋진 말입니다. 영어의 firefly는 ‘불빛을 내는 파리’라는 뜻이고, 일본어 호타루(ほたる)는 불을 받든 벌레, 독일어 로이히트케퍼(Leuchtkfer)는 불을 켜 든 투구풍뎅이라는 뜻입니다. 여름에 하도 흔해서 우리나라에서는 개똥벌레라고 불렀고 지역에 따라 까랑, 까래이, 까리, 개동벌거지 등의 사투리가 있었지만, 지금은 반딧불이 보기가 힘들어진 지 오래입니다.

이번에 반딧불이를 만나러 가게 된 것은 여름 내내  5·7·5의 17음(音) 형식으로 이루어진 일본의 전통시 하이쿠를 많이 읽었기 때문입니다. 하이쿠에는 반딧불이를 노래한 작품이 참 많습니다. 아련히 떠오르는 어린 시절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반딧불이가 많은 무주를 찾게 했습니다. 올해 반딧불이축제는 이미 6월 7일부터 15일까지 열렸습니다. 나는 8월 말에 주로 나타나는 늦반딧불이를 만나러 갔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애반딧불이, 운문산반딧불이 다음에 늦반딧불이가 나타납니다.

애벌레 기간이 2년이나 되는 늦반딧불이는 달팽이를 잡아먹다가 어른이 되어서는 이슬만 먹고 삽니다. 그렇게 사는 기간이 겨우 스무날 남짓. ‘螢二十日に蟬三日’, “반딧불이는 스무날, 매미는 사흘”이라는 일본 속담은 두 생명의 짧음을 잘 알려줍니다. 반딧불이의 삶은 덧없고 반딧불이와 만나는 인간의 삶은 하염없습니다. 한때 빛나던 것들, 그토록 소중했던 것들도 시간이 지나면 다 빛을 잃습니다. ‘날이 밝으면/반딧불이도 한낱/벌레일 뿐.’ 생몰연대를 알 수 없는 아온(阿言)의 작품입니다. 무카이 교라이(向井去來·1651~1704)가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사세구(辭世句)는 ‘쉽게 빛나고/또 쉽게 불 꺼지는/반딧불이여.’였습니다.

반딧불이를 처음 본 아이들이 잡아달라고 조릅니다. 잠자리나 나비처럼 쉽게 잡을 수 없다는 걸 모르는 나이입니다. ‘둥그런 달을/따달라고 조르는/어린이로다.’ 고바야시 잇사의 작품과 같은 내용입니다. 아빠의 목말을 탄 아이 중에는 이 시처럼 별을 따달라고 하는 녀석도 있었습니다. 별도, 반딧불이도 잡아주지 못한 아빠는 “잘 있어. 다음에 또 만나”라고 별과 반딧불이에게 인사를 시킵니다. 다음에 만날 반딧불이는 물론 그 반딧불이가 아닙니다.

‘꽃그늘 아래/생판 남인 사람은/아무도 없다.’는 고바야시 잇사의 절창이지만, 그날 반딧불이를 보러 간 300여 명도 30여분 동안 서로가 남이 아닌 것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반딧불이를 원 없이 보고 돌아오는 길에 내려다본 국도에서 꼬리에 불을 단 자동차들이 달리는 모습이 또 다른 반딧불이로 보였습니다. 반딧불이의 목숨만 짧은 게 아니라 인간의 목숨도 이 유구한 천지에 비하면 수유(須臾)일 뿐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에는 반딧불이에 관한 시나 작품이 그렇게 적은 것일까? 방랑과 기행으로 유명한 김삿갓의 작품에서도 개똥벌레나 매미 등을 노래한 시는 없습니다. 지위와 명예를 버리고 고행의 나그넷길에 스스로 나선 일본의 시인들과 너무도 대조적이어서 의아스럽고 아쉽습니다. 청산과 녹수, 자연 자체에 대한 관심과 흥취는 높지만 하이쿠에 담긴 것과 같은 덧없는 생명, 미물에 대한 애정을 찾아보기는 힘듭니다. 우리의 문학전통에서 그런 것들은 더러 등장한다 해도 다만 상징일 뿐 그 자체의 생명은 아닌 것 같습니다.

반딧불이가 사라지면 여름은 갑니다. 당의 시인 원진(元·779~831)은 夜坐(야좌)라는 시에서 螢火亂飛秋已近 辰星早沒夜初長(형화난비추이근 진성조몰야초장), ‘반딧불이가 어지러이 나니 가을 이미 가까웠고, 수성(水星)이 일찍 지니 밤이 길어지기 시작하네.’라고 했습니다. 여름을 보내는 것은 봄을 보내는 것과 느낌이 다르지만, 반딧불이가 알려주는 계절의 이행과 변화에는 역시 민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네다 산토카(種田山頭火·1882~1940)는 ‘모두 거짓말이었다며 봄은 달아나 버렸다.’고 했습니다. 여름도 그러는 것 같습니다. 거짓말 같이 여름이 가면서 이제 9월이 됐습니다. 그리고 38년 만에 빨리 9월 초에 서둘러 찾아온다는 추석이 임박했습니다.

필자소개

임철순

1974~2012년 한국일보 근무. 문화부장 사회부장 편집국장 주필 및 이사대우 논설고문을 역임했다.
한국기자상, 삼성언론상, 위암 장지연상 수상.
현재 한국일보 논설고문, 자유칼럼 공동대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한국1인가구연합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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