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우정, 다시 시작해야 [이성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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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우정, 다시 시작해야

2014.08.27


1960년대 국내에서 열린 어느 국제 청소년워크숍(International Youth Workshop)에 참석한 일본 청소년들이 행사 기간 중 일제 만행 사실을 듣고는 가슴 아파하며 속죄의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입니다만, 일본에서 열린 학회의 만찬 자리에서 나눈 에피소드입니다. 동석한 제자가 필자를 일러 일본 태생이라고 말했더니 거기 있던 일본 교수 모두 놀라워하면서도 의아해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네들과의 친분이 한두 해도 아닌데, 필자가 그간 일본말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사실에 놀라운 표정을 숨길 수 없었나 봅니다. 모두 필자만 바라보며 뭔가 설명을 기다리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래서 일본에서 태어나 1943년 가족이 현해탄을 넘어 서울로 돌아왔다는 것과 1945년 해방이 되자 필자는 일본말만 하고 한국말을 전혀 못하는 상황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Go Japan” 소리를 수없이 들었고 그래서 일본어를 더 필사적으로 잊으려 노력한 것 같다는 등의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이제는 일본말을 하고 싶어도 ‘벙어리’가 되어버렸다고 웃으며 넘긴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오랜 교분을 나눈 동료 내외가 필자에게 다가오더니 일본인들 고유의 겸손한 태도로 저에게 깊이 사죄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필자가 어리둥절해하면서 “무슨 사죄냐?”고 묻자, 그 내외는 만찬 후 객실에 올라가 일본이 한국에 저지른 죄상(罪狀)이 얼마나 큰가를 새삼 깨달으며 많이 울었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렇듯 워크숍의 일본 청소년이나 만찬 자리의 일본 교수가 보여준 공통점은 일제강점기에 한반도, 우리 민족에게 저지른 엄청난 만행에 대해 ‘공부’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와는 조금 다른 예가 있습니다. 얼마 전 프랑스에서 이웃 나라 문화에 대해 대화를 하다가, 조심스레 독일에 대한 감정을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40대의 프랑스 젊은이는 즉시 독일과 친구 관계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모친도 동감한다는 표정이었습니다. 프랑스와 독일, 독일과 프랑스 두 나라 간의 길고도 깊은 갈등의 역사는 너무도 잘 알려진 ‘상식’이기에 조금은 이상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영국하고는?” 하며 다시 묻자, 곧바로 적대 관계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필자가 조금 의아해하는 표정을 엿본 그의 모친은 “영국과 프랑스 간에는 백년전쟁(1337~1453)의 응어리가 남아 있어서…”라며 이해를 구하듯 짧은 코멘트를 덧붙였습니다. 필자는 순간 도버(Dover) 해협에 면한 프랑스 북녘 항구도시 칼레(Calais) 시청 앞 광장에서 거장 로댕(August Rodin, 1840~1917)의 불후의 명작 <칼레 시민상(Le Bourgeois de Calais, 1889)> 조각을 본 기억이 스쳐갔습니다.

그러고 며칠 후 독일에서 지인을 만나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독일과 프랑스, 프랑스와 독일 간의 관계가 어떠하냐고. 역시 “우리 두 나라는 우정을 나누는 사이”라는 답을 들었습니다. “그럼 영국과는?” 하는 물음에는 조금은 흐린 음색으로 그냥 긍정적이라고만 했습니다.

근래 한일 관계가 심상치 않은 상태에 이르면서 같은 세계대전의 패망국인 독일이 이웃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 측면에서 얼마나 진지하고 집요하게 ‘사죄의 몸부림’을 했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국가 차원의 장기적 정책이 뒷받침하고 있다는 사실은 잊고 있습니다.

프랑스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 1890~1970) 대통령과 독일 콘라드 아데나워(Konrad Adenauer, 1876~1967) 총리는 1963년 ‘엘리제 조약(Elyse-Vertrag)’, 일명 친선 조약(Freundschafts-Vertrag)을 체결합니다. 이는 경제협력을 촉진하자는 조약이 아닙니다.

이 친선 조약을 체결할 당시 필자는 정치인들 간에 맺는 시쳇말로 MOU 정도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협정 이후 양국 간의 교류에는 입국 비자 절차가 없어지고(당시 국경을 통과하려면 엄격한 입국 절차를 밟아야했습니다), 정부의 재정적 도움을 받으며 청소년들이 무리 지어 오가는 모습을 보면서 놀라워했습니다. 오늘날 독일 사회에서 프랑스어가 얼마나 보편화되어있는지를 알게 되면서 새삼 많은 생각을 합니다. 1963년 조약 결과 60~70년대에 비해 필자의 주변에 프랑스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독일 사람이 많지 않던 상황과 너무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국가 정책 차원의 힘을 확실히 체험한 것입니다. 결국 양국 청소년들이 국경을 넘나들며 이웃 나라 풍습과 문화를 습득하니 불편해하던 거리감은 완화되고, 이해의 깊이와 폭을 더하니 우정은 자연스레 깊어간 것입니다.

내년 2015년이면 광복 70년, 한일 국교 수립 50년이 되는 해입니다. 우리 미래 세대인 청소년을 위해서 서로 교류하며 역사와 문화의 폭을 넓히는 공감대를 다시 새롭게 형성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국가 차원의 적극적 자세와 정책을 모색하는 것이 절실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필자소개

이성낙

뮌헨의과대 졸. 프랑크푸르트대 피부과학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
현재 가천대 명예총장, 의사평론가,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

박대문의 야생초사랑

분홍바늘꽃 (바늘꽃과) Epilobium angustifolium

광활한 대지가 끝 모르게 이어지는 바람과 초원의 나라, 몽골(Mongolia). 면적은 156만 ㎢로서 남한의 16배, 인구는 280만 명으로 남한의 1/17. 넓고 푸른 대양에 떠 있는 섬처럼 광활한 초원에 점점이 솟아오른 산봉우리에는 잎갈나무와 자작나무가 녹색 짙은 숲을 이루고 있었고 숲과 벌판에는 야생화가 지천으로 널려 있었습니다.

필자소개

박대문

환경부에서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과장, 국장, 청와대 환경비서관을 역임했다.
우리꽃 자생지 탐사와 사진 촬영을 취미로 삼고 있으며,
시집 『꽃벌판 저 너머로』, 『꽃 사진 한 장』, 『꽃 따라 구름 따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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