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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남아 있는 옛 일본의 아픈 상처
2014.08.21
팔월의 어느 일요일 아침, 막 식사를 끝낼 무렵에 전화가 왔습니다. 일본 후쿠오카(福岡)의 한 부인이었습니다. 11호 태풍 할롱이 시고쿠(四國)에 상륙했다는 뉴스를 들었기에 그 인사부터 했더니, 이 오랜 친구는 지금 옛 일본 탄광 조선인 광부들에 관한 책을 읽고 있는데, 제 생각이 나 전화를 걸었다는 것입니다. 1995년에 알게 된 이 아주머니의 남편은 마침 제가 일제강점 말기에 잠깐 적을 둔 도쿄(東京)의 모 대학 후배여서 우리는 곧 가족끼리 가까운 친구가 되었습니다. 제가 후쿠오카의 어느 탄광촌에서 태어난 것을 알고 몇 해 전에는 그곳까지 안내해 준 친구입니다.대강 알고는 있었지만 그 책에 나오는 조선인 광부 생활은 자기가 들은 것보다 훨씬 더 비참한 것이었다고 하며, 다 읽은 후엔 그 책을 보내주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2007년에 ‘바람이여, 전해다오’라는 재일교포 김광열(金光烈) 씨가 쓴 책을 곧 연상하며, 전시 위안부 문제와 함께 아직도 한ㆍ일 두 나라 사이 미해결문제로 남아 있는 전시 강제노동자 이야기를 머리에 떠올렸습니다. 저는 후쿠오카 구라테(鞍手)군의 한 탄광촌에서 태어났습니다. 미쓰비시(三菱) 소속인 그 탄광은 대우와 시설이 비교적 좋은 편이어서 조선인 관계 사고는 그렇게 많지 안핬습니다. 그래도 가끔 조선인 탈주 사건 등으로 노무과(勞務課) 소속인 아버지가 일본 경찰의 조사를 받던 어릴 적 기억이 있습니다.조선인 광부에 대한 일제의 만행은 커갈수록 귀에 들어왔습니다. 반세기 후, 제가 태어난 곳을 그 친구 부부의 안내로 찾았을 때, 일제의 조선인 광부에 대한 비참한 대우 흔적은 폐광 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고, 일본인 민간단체들에 의한 옛 기록이나 경험담을 찾는 노력을 여러 곳에서 알 수 있었습니다.그러던 중, 2007년 가을 나라(奈良)의 일본인 친구가 서점에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이 책을 보내왔습니다. 1927년 경상북도의 시골에서 태어난 김 씨는 1943년에 일본으로 건너 가 광복 후에도 그곳에 남아, 1955년에 도쿄에 있는 리쓰메이칸(立命館)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한 후, 후쿠오카시의 초ㆍ중ㆍ고에서 교편을 잡았다고 책 말미 약력에 쓰여 있었습니다.그러다 1969년에 조선인 광부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동포의 사라져가는 역사의 조사, 발굴, 기록 소개 그리고 강연, 현지 안내 활동’등을 시작했으며, 2007년 현재‘청구(靑丘)역사문화연구회' 대표와 국제친선단체인 ‘경주문화친선교류회' 회장으로 있다고 소개되었습니다.‘후쿠오카지방 조선인 광부의 기록’이란 부제(副題)가 달린 200쪽이 넘는 이 책에는, 당시에도 남아 있던 네 곳의 소규모 광업소를 방문해 얻은 정보와, 16개 부근 불교 사찰을 찾아 그 절의 유골 보관소, 유골 정리장(整理帳), 납골당 등과 절 역사를 기록한 ‘과거첩(過去帖)’등을 뒤적여 얻은 조선인 광부의 희생 상황이 적혀 있었습니다. 절을 방문 조사한 이유에 대하여, 김광열 저자는 이렇게 말했읍니다: “아무리 차별과 학대를 받은 사람일지라도, 사람인 이상 이름은 있을 것이고, 애비가 있고 친척이 있을 것입니다. 유골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포장된 위에 <조선인> <반도> 등의 표기 외에 어떤 경우에는 조선인 대신 조선인의 <선> 또는 <어(魚)> 한 자만 써놓은 경우가 있었습니다.”일본은 불교가 국교는 아니지만 국민의 거의 전부가 장례와 묘지 관계로 사찰과 어느 정도는 관계가 있습니다. 관공서나 광업소 또는 얼마 남지 않은 생존자 등에서 충분한 자료를 얻지 못한 저자가 마지막 수단으로 찾아간 곳이 사찰이었습니다.이 책의 특징은 전시에 징용으로 끌려 간 사람은 물론이고, 그 전에 생계가 어려워 일본으로 건너 가 결국 탄광촌에 정착하게 된 ‘자유노무자’도 포함시켜, 그들에 대한 학대, 열악한 식량사정, 지도원의 집단 구타로 인한 살인사건 등을 소개한 점입니다. 한 광업소 산하 세 광산에 관한 1944년 1월 말 현재 통계에, 조선인 노무자 수는 9,180, 도주자 4,732, 귀환자 1,670, 사망 75로 되어 있으니, 그 참상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일본은 아시아 각지나 태평양 섬 등에서 희생된 병사의 유골 송환에 관심을 갖고 있지만, 강제노동에 희생당한 우리 동포에 무관심한 것은 ‘너무나 자기중심적이고 인도에 어긋나는 큰 문제 아니겠습니까?’라고 이 책은 묻고 있습니다.명년이면 패전 70년, 일본은 이미 ‘전후 70년’정리로 한창입니다. 언론 매체를 비롯하여 민관(民官) 공히 이 작업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최근에 호주를 방문한 아베 신조(安倍晉三) 총리는 남태평양 한 전적(戰跡)에 들러, 아직도 귀국을 기다리는 수많은 일본인 유골의 빠른 귀국을 약속했습니다. 7월 하순, 일본 후생성이 유골 수집단을 러시아 연해(沿海)지방에 보냈을 때, 일행 중 유일한 88세의 억류 군인 생존자 한 사람이 아직도 기억하는 러시아말로 ‘이곳, 카파치’라고 현지 작업원에 부탁하는 장면을 아사히(朝日)신문이 보도했습니다. ‘카파치’는 '파다(掘)'라는 러시아말 단어라 합니다. 러시아 땅엔 아작도 3만4천의 일본인 유골이 남아있다 합니다.광부 이외로 일본군인이나 군속으로 끌려가 희생된 우리 동포의 유골도 귀국하지 못한 수도 많으나, 정작 끌고 간 일본정부의 무관심은 양심 있는 일본인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습니다. 이분들 외에, 일제 말에 학교를 쫓겨나 일본군에 동원된 4천 명을 넘는 조선인 학도병과 수만의 조선인 징용병에 관한 변변한 공식 기록도 없는 대한민국입니다. 일본의 학도병과 ‘가미카제(神風)특공대’등의 기록을 조사하는 민간단체‘와다쓰미(海神)'회는 인터뷰를 위해 여러 번 저를 포함한 한국인을 찾아왔으며, 저의 모교에서도 학도병 조사로 교수를 포함한 네 사람이 저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후쿠오카의 부인이 보내 줄 책에는 조선인 광부의 또 어떤 새로운 사실이 소개되어 있는지 궁금합니다.
필자소개
황경춘
일본 주오(中央)대 법과 중퇴AP통신 서울지국 특파원, 지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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