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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발점에서

2014.06.23


도서관에 ‘처박혀’ 있거나 온종일 ‘방콕’을 하다 저녁 무렵 바깥 바람을 쐬러 나갈 때면 마치 어두운 극장에서 거리로 나설 때처럼 일순 뜨악하니 균형 잃은 현실감각에 휘청댑니다.

번다한 ‘저잣거리’를 ‘산책’하며 집요하게 달라 붙는 골똘한 생각을 흩어버리는 것이 ‘상책’일 때가 바로 이런 때입니다.

시쳇말로 ‘아이 쇼핑’이라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걸어서 집과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백화점을 이따금 가는 이유도 그래서입니다.

마치 좌뇌와 우뇌 사이의 뇌들보가 활성화돼야 감성적 반응과 이성적 판단이 조화롭고 유연하게 조응하듯이, 내 속에 침잠하는 시간과 현실 사이에 괴리가 덜 일어나게 하려면 현대 문명의 총아이자 상징인 백화점을 둘러보는 것도 하나의 수단입니다.  

엊그제는 장난기가 슬쩍 동하여 가발 코너에 발길이 멎었습니다. 짧은 커트 스타일인 제 머리에는 아무 가발이나 얹어도 본 머리카락이 비집고 나오거나 어설프게 둥개진 모양은 아니라 이것저것 써보기로 치면 모자 가게보다 훨씬 재미있었습니다.

영화 <아마데우스>의 모차르트처럼 거울 앞에 앉아 가발 쓴 내 모습에 깔깔거리며, 관심도 없거니와 상상도 못했던 어마어마한 가격에 놀라는 재미도 있었는데, 진짜 머리카락이냐는 내 궁금증에 중국 여성의 ‘인모’ 라는 판매원의 말이 돌아왔습니다.

순간 장난기가 ‘싸~악’ 가시면서 어릴 적 동네를 맴돌던 ‘머리카락 파이소!’ 라는 소리가 귓전을 스쳤습니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머리카락 장수의 손아귀에 잡힌 말총머리 처녀의 머리카락이 고무줄에 묶인 채로 ‘싹둑’ 잘려 나가는 어릴 적 상상은 두렵고도 슬펐습니다.

그렇게 잘려진 머리카락이 가발 공장을 거쳐 이른바 구미 선진국에 수출되었다는 건 ‘가발공장 여공에서 하버드 대학까지’의 주인공 서진규 박사의 자서전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에서 실감나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머리카락이 이제는 가난한 중국 여성들로부터 ‘채집’되어 우리나라로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이 망연하고 아득하게 다가왔습니다.

한 묶음의 머리타래를 식구들의 끼닛거리나 몇 푼의 급전으로 바꿔야 하는 절박한 가난의 설움 저편에는 그것으로 가체를 만들어 쓰든, 성긴 머리숱을 덧둘렀든 여유와 호사를 누리는 안방 마님이나 규수의 존재가 있다는 것이 민망했습니다.

나이들수록 머리카락이 가늘어지고 ‘히마리’ 없어지는 것에 대비해 젊은 처녀의 탄력 있는 그것으로 만든 가발 하나쯤을 장만해 두면 언제나 탐스러운 머리 치장을 즐길 수 있다며 과장을 떠는 판매원의 말이, 마치 회춘을 위해 동녀와 동침한다는 돈 많은 늙은이의 짓거리처럼 망측하게 들렸습니다.

남자들처럼 절실한 필요로 가발을 찾는 경우 말고 멋으로, 재미 삼아 가발 가게를 기웃거린다면 가난한 어린 처녀, 혹은 가족의 생계가 막연한 부녀자들의 서러움과 고달픔 같은 것이 찜찜하게 내 머리에 얹혀져 있다는 생각이 한 번쯤은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어찌 가발뿐일까요?

머리카락이야 다시 자라면 그만이지만 심지어 열 살도 채 안 된 아동들의 노동력을 착취해서 만든다는 중동 지역의 고급 양탄자, 온종일 카카오를 따고 수확된 카카오가 담긴 무거운 양동이를 운반하며 배 곯고 일해야 하는 아프리카 지역 미성년자들의 ‘초콜릿’이나, 비슷한 경로로 채취될 커피 농장의 현실은 또 어떤가요.

일상 중에 무심코 대하는 고급스럽고 사치스러운 생활용품, 기호품, 취미용품 중에는 그것을 생산해 낸 이의 땀과 눈물 정도가 아닌 불공평하고 부조리한 세상에 한과 원이 맺혀 있는 것이 부지기수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잘못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나 그들을 위로하고 희망을 줄 능력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으니 무기력한 자신에 화가 납니다.

다만 나는 커피나 초콜릿을 별로 안 좋아하고, 가발도 안 쓰고, 고급 양탄자는커녕 허접스런 발닦개가 하나 있을 뿐, 이도 없고, 저도 없고, 아무튼 가진 게 거의 없으니 그런 걸 만드는 사람들을 덜 괴롭혀서 덜 미안할 따름입니다.

물론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세상 사람들 모두가 나 같다면 그네들이 그 돈이나마 못 벌게 되지 않을까 염려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요.  

필자소개

신아연

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1992년 7월, 호주로 떠났다. 시드니에서 호주동아일보 기자, 호주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으로 일하다 2013년 8월, 한국으로 돌아와 자유기고가, 강연자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는 중앙일보, 여성중앙, 과학과 기술 등에 에세이를 연재하며, KBS 라디오에 출연 중이다.    
낸 책으로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이 있고, 2013년 봄에 <글 쓰는 여자, 밥 짓는 여자>를 출간했다.
블로그http://blog.naver.com/shinayo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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