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향한다 - 조은산

 

무능·부패한 진보를 눈앞에 두고 보수는 분열하니

나도 살길 찾아 전향한다, 고고하게 빛나는 진보로

 

조은산 '시무7조' 저자

 

   진보는 무능해서 망하고 보수는 부패해서 망한다고 어느 누가 말했던가. 무능하고도 부패한 진보를 목전에 두고 보수는 지금 분열로 망해가고 있다. 정권 교체를 향한 작은 의지를 담아 그동안 나 조은산은 얼마나 많은 글을 써왔던가. 문득 눈을 들어 바라보니 가야 할 곳이 보이지 않아 나는 마땅히 내 살길을 찾아 나설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마침내 전향한다. 차라리 나는 진보주의자가 되겠다. 내 안에 꿈틀대는 자아 혁신의 본능과 자산 가치 증대라는 원초적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 진보라는 타이틀은 제법 잘 어울린다. 그것은 몸에 착 감기는 슈트처럼 은은한 광택을 뿜으며 인간 조은산을 더욱 고고하고 유려하게 만들어 주리라. 이제 목청을 가다듬고 소리 높여 외쳐본다.

 

고위직 한번 해먹으려면, 그래 ‘인권’을 골라잡자

기부금으로 갈비 먹고 과태료 내도 국회의원이네

야망을 소망으로, 욕심을 민심으로 꾸밀 줄 알면

나도 대통령감… 사익이 정의가 되니 얼마나 좋은가

 

일러스트=이철원

 

적폐 청산, 친일 청산, 평화 통일, 민주노총, 재벌 개혁, 포퓰리즘, 페미니즘…. 아, 비례대표 1번이다. 역시 전형적 운동권 타입의 스위트한 멘션은 그 효과가 참으로 훌륭하다. 이번엔 좀 더 숭고한 감정을 실어 촉촉한 눈망울로 애원하듯 말해본다.

 

 

 

노동자, 서민, 가난, 고통, 아픔, 슬픔, 촛불, 진실, 희망…. 아, 팔도강산 표가 다 밀려들어 오는구나. 사무처장님, 보좌관은 아리따운 여성으로 부탁드립니다. 여보, 집은 팔지 마시오. 이제 노무현과 5·18 그리고 세월호만 사수하면 나도 어엿한 중진이다.

 

어차피 세상 이치가 다 그런 것이다. 벌어먹긴 힘들어도 빌어먹긴 쉬운 것이다. 자, 이제 선출직을 해봤으니 임명직도 해보자. 장·차관급 한번 해 먹으려면 무얼 먼저 해야 하겠는가. 가장 먼저 비집고 들어갈 곳은 도처에 난립한 시민 단체다. 관직을 사고파는 시장통인 이곳엔 없는 게 없다. 입맛대로 골라잡자. 그래, 인권. 인권이 제일 만만하고 좋겠다. 검붉은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나는 민변으로 간다.

 

자녀가 보는 앞에서 어머니를 칼로 난자해 살해한 한 살인자가 여기 있습니다. 그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합니다. 아니지요. 그는 심신 미약 정황이 있으니 징역 15년 정도가 적당하지요. 분하다. 선출직을 노린 ‘핫바리’ 인권 변호사가 내 공을 가로챘다. 자, 이제 다음 사건.

 

전과 17범의 범죄자가 초등학생 여자아이를 화장실로 끌고 가 강간하여 신체 일부에 영구 장애가 예상되는 중상해를 입혔습니다. 그는 벌써 출소했고 두려움에 떨던 피해자는 결국 이사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피해자보다 가해자의 인권에 초점을 맞춘 형사 사법 제도 전반을 재정비해야 합니다. 아니지요. 먼저 인간 존중의 가치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이끌어냄으로써 처벌보다는 교화를 통해 범죄자들의 갱생과 사회 복귀에 일조해야지요. 그것이 내 언변만큼 화려한 민주와 인권의 가치 아니겠습니까? 뭐라고요? 아이가 불쌍하지도 않냐고요? 상관없습니다. 내 자식이 아니니깐요.

 

이제 젖과 꿀이 흐르는 정의연만 거치면 시민 단체는 섭렵이 가능하다. 위안부 할머니는 정확히 내 계좌 잔액을 위안한다. 이미 배출된 정의연 출신 국회의원과 시민 단체 출신 장·차관만 해도 수두룩한데 기왕 해 먹는 김에 나도 돈 좀 벌어보자. 기부금으로 갈비도 먹고 안마도 받고 과태료도 대납하자. 요가로 몸매 관리받고 진보 단체 운영비도 지원하자. 놀랍게도 나는 아직 현역 국회의원이다. 이것이 진보의 힘이고 시민 단체의 힘이다.

 

 

그리하여 야망을 소망으로 포장하고, 욕심을 민심에 대입할 능력이 생겼다면 나도 어엿한 대통령감이다. 장·차관급 해보니깐 뭐 별거 없다. 나도 방탄 벤츠 한번 타보자. 그래도 뭔가 부족하다 싶으면 그건 바로 귀족 노조다. 최고가 담배 ‘클라우드 나인’이 출시됐을 때, 요놈의 담배꽁초가 제일 많이 쌓여 있던 게 민주노총 시위 현장이었다지.

 

연봉 1억의 조합원들과 함께 거리로 나선다. 노동 가요가 울려 퍼진다. 노래 제목은 ‘철의 노동자’. 도입부가 인상 깊다. ‘민주노조 깃발 아래, 와서 모여 뭉치세.’ 중반부는 격조 높다. ‘파업만이 살길이요, 정규직이 살길이요, 내 하루를 살아도 귀족처럼 살고 싶다.’ 후반부는 처절하다. ‘단결 투쟁 우리의 무기, 너는 너, 나는 나, 돈의 노동자.’ 뒤풀이는 NHK 단란주점이다. 아가씨는 정중히 사양합니다. 이미 일행 중에 있으니까요.

 

결국 술에 취해 비틀대던 나는 클라우드 나인을 뽑아 물고 거리를 배회한다. 그때다. 지나가던 택시가 멈춰 서더니 내게 묻는다. ‘손님. 어디로 가세요?’ 나는 대답한다. ‘사람 사는 세상, 나라다운 나라로 갑시다. 요금은 얼마요?’ ‘그런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저승 가는 길이 오히려 할증 없이 싸게 먹히겠네요. 허허.’ 허탈하게 웃으며 대꾸하는 택시 기사 역시 클라우드 나인을 입에 물고 있다. 그의 얼굴을 잠시 눈여겨보니 온화한 미소에 이마에는 깊은 주름이 새겨져 있다. 왠지 낯이 익다. ‘그렇다면 봉하로 갑시다. 내가 대통령 좀 해 먹으려는데, 거기가 필수 코스라 하더이다.’ 그러자 택시 기사가 답한다. ‘차라리 내 무덤을 파헤치시오. 그리고 동원된 인부들에게 정당한 임금을 지불하시오. 그거면 나는 됐습니다.’ 부웅 하더니 택시가 떠난다.

 

취한 내 발걸음은 갈지자로 휘청이고 있다. 그러나 진보가 나를 일으켜 세워 주리라. 진보가 나의 삶을 진리로 이끌어 주리라. 진보가 우리네 삶을 진일보시켜 주리라. 어느새 정신 차리고 보니 나는 토사물이 고인 진창에 빠져 있었다. 그렇게 나는 전향했다. 분열의 보수에서 벗어나 일치된 무능과 부패의 길에 합류했다. 사익을 정의로 포장한 대열에 들어섰다. 차라리 지금이 속 편하다. 이 얼마나 좋은가.

조선일보

 

케이콘텐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