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성은 말한다 [김영환]


안시성은 말한다 [김영환]


www.freecolumn.co.kr

안시성은 말한다

2018.10.05

오랜만에 영화관에서 국산 영화 ‘안시성’을 보았습니다. 엄정화와 황정민이 나온 ‘댄싱 퀸’을 본 이후 처음이라고 기억합니다.  

당 태종 이세민이 서기 645년(고구려 보장왕 4년) 수십만 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고구려 친정(親征)에 나섭니다. 명분은 고구려의 실권자였던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당나라에 온건했던 영류왕과 신하들을 살해하고 조카를 왕으로 옹립한 죄를 묻는다는 것입니다. 당 태종은 고구려가 천리장성을 쌓으며 요동에 구축한 개모성, 요동성, 백암성을 차례로 함락하지만 안시성에서 발이 묶입니다.  

당군은 하루에도 6~7차례나 거대한 통나무로 성벽에 충격을 주는 충거(衝車), 지렛대와 원심력을 이용해 돌을 퍼붓는 포거(抛車, 투석차) 등으로 공략하지만 안시성 성주 양만춘은 출중한 지략으로 당 태종의 집요한 공성을 물리칩니다. 태종은 안시성 함락에 계속 실패하자 두 달간 연인원 50만 명을 동원해 안시성보다 더 높은 토성을 쌓습니다. 

디지털 기술이, 집요한 당 태종의 공성탑(攻城塔) 공격을 막아내는 전투 장면을 박진감 넘치게 담아냅니다. 나무로 높은 탑을 만들고 안시성 성벽에 다리를 걸쳐 침입하려는 당군에게 안시성 군사들은 기름 주머니를 공중으로 던지고 불화살을 쏘아 터트려 탑을 불바다로 만듭니다. 당시 철광에서 일한 경험자들이 토성 밑으로 땅굴을 파고 나무 기둥들을 도끼로 찍어 무너트리며 산화합니다. 화가 날 대로 난 당 태종이 결전을 진두지휘하며 다가오는데 고립무원의 양만춘은 고주몽의 전설이 담긴 신궁(神弓)의 활시위를 당겨 당 태종의 왼쪽 눈에 명중시킵니다. 군대의 사기는 떨어지고 피곤에 지친 당 태종은 추위가 다가오자 공성 88일 만에 철군합니다. 

‘동북아 최대의 전승’이라고 일각에서 찬양하는 안시성 전투를 이끈 성주의 이름이 아쉽게도 정사(正史)에서는 전해지지 않습니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양만춘(楊萬春)이 당 태종의 눈을 쏘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고 썼습니다. 그는 사서의 누락에 대해 “중국은 수치를 숨기기 위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우리 본토에서는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사실을 단 한마디도 감히 쓰지 못했다”고 한탄합니다. 

영화 ‘안시성’의 감독은 김광식, 양만춘 역은 조인성, 그의 여동생이자 여군 부대장인 백하는 설현, 당 태종은 박성웅이 맡아 열연합니다. 태학에 다니던 학도병 사물(남주혁)이 안시성을 돌아보며 떠나는 마지막 장면은 서부영화를 연상시킵니다. 

이 영화를 보며 지난달 하순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이 4일간 동북 3성을 시찰하면서 한반도 유사시 개입할 가능성이 높은 만주의 제79집단군의 장병을 격려했다는 보도들을 떠올렸습니다. 환구시보는 작년 4월 "만약 한미 양국이 38선을 넘어 북한에 공격을 가하고 북한 정권을 전복시키려고 하면 중국도 즉각 군사적 개입을 진행할 것"이라고 보도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되지만 당 태종을 보며 현존 중국 최고 권력자 시진핑의 얼굴이 오버랩되는 것입니다.  

당나라 수십 만 대군에 맞선 안시성 군사 5,000명은 무엇으로 싸웠을까요. 고구려와 10만 안시성 사람들의 소중한 것을 지킨다는 신념이었습니다. 양만춘은 외칩니다. 
“당나라 군대가 오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모두가 나에게 물었다. ‘성주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때 나는 싸울 거라고 말했다. 어쩌겠느냐? 내가 물러서는 법, 배우지 못한 걸. 나는 무릎 꿇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항복이란 걸 배우지 못했다. 내가 배운 건 싸워야 할 때는 싸워야 한다는 거다. 어느 놈이건 나의 소중한 것을 짓밟고 빼앗으려 하면 목숨 걸고 싸워야 한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저 뒤를 돌아봐라. 안시성 사람들을…. 우리에게 소중한 건 바로 저들이다. 저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자….”  현대어로 전하는 영화 속의 대사는 전의를 불태운 안시성 사람들의 투지가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라고 믿게 합니다. 

안시성(安市城), ‘저잣거리가 편안한 성’이라는 뜻도 담긴 이름이죠. 성주가 당의 회유에 굴종하여 항복했다면 목숨은 부지하고 노예처럼 복속되었을 테지만 고구려인로서의 투혼이 이를 막아 후손들에게 자랑스러운 역사를 남겼습니다. ‘좋은 전쟁보다 나쁜 평화가 낫다’라는 개념은 양만춘의 뇌리에 없었습니다. 영토의 가로가 1만 2,000 리, 세로가 1만 리라고 자랑하는 당을 물리쳤습니다. 

당 태종은 안시성에서 철군하면서 홀로 예를 표하는 성주에게 비단 100필을 하사했다고 신당서의 동이열전 고구려 편은 적고 있습니다. 여당(麗唐) 1차 전쟁에서 물러난 당 태종은 신하들의 건의에 따라 국지전으로 괴롭히지만 유언에선 고구려를 다시 공격하지 말라고 했다고 전해집니다. 요즘에도 읽히는 ‘정관정요(貞觀政要)’라는 신하들과의 정치 문답집을 남긴 당 태종은 무리한 원정 등에 따른 와병으로 4년 뒤인 649년 사망합니다. 양만춘의 안시성은 고구려가 668년 멸망한 뒤에도 버티다가 670년 함락돼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안시성주는 침략자에 대항하는 임전무퇴의 정신을 북돋아주었습니다. 군대는 사기를 먹고 나라를 지키는 방패입니다. 그런데 지난 10월 1일 건군 70돌 축하 행사는 이상한 이브닝 쇼로 전락했습니다. 잔치는 대낮에, 시가행진은 최고로 성대하게 펼쳤어야 했습니다. 장병들은 피곤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군 인권센터 같은 사조직이 설치면서 땅에 떨어진 군의 사기를 높일 수도 있었습니다. 방어형인 자유 대한민국 국군의 첨단 무기 퍼레이드 자체가 도발 전쟁에 억지력이 있음을 내외에 과시하는 것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미묘한 한반도 화해무드에서 북한 비핵화의 진정한 데탕트가 이루어질 때까지 군은 정치에 휘둘리지 말고 매의 눈을 갖고 국방 본연의 임무를 다해야 합니다. 문약하기 이를 데 없는 대한민국에서 1,300여 년 전, 드넓은 요동 영토를 지키려고 목숨을 걸었던 고구려의 DNA, 양만춘 같은 지도자가 그리워집니다. 양만춘은 1998년 배치된 우리나라 3,000톤급 해군 구축함 명명으로 그 정신을 알리고 있어 다행입니다. 역사적 팩트를 추구하기엔 너무나 벅찰 사료(史料) 부족에도 불구하고 치밀한 상상력으로 멋진 안시성 영화를 만든 이들에게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 기회가 오면 안시성 옛터를 찾아서 돌아보고 싶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이 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상업적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김영환

한국일보, 서울경제 근무. 동유럽 민주화 혁명기에 파리특파원. 과학부, 뉴미디어부, 인터넷부 부장등 역임. 우리사회의 개량이 글쓰기의 큰 목표. 편역서 '순교자의 꽃들.현 자유기고가.

Copyright ⓒ 2006 자유칼럼그룹.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freecolumn.co.kr

           

댓글()